이 책의 저자 비나 다스는 학부부터 박사학위 수여까지 인도 델리 대학교에서 수학한 인도 ‘토종’ 인류학자이다. 본 번역서 『구조와 인식: 힌두 카스트와 의례의 양상』은 산스크리트 원전을 사회과학적 관점에서 분석한 자신의 박사학위 논문에 힌두 공간의 상징성에 관한 몇 편의 논문이 토대가 되어 출판된 단행본이다. 이 책은 인류학자라면 ‘기정사실’로 여기곤 하는 특정 지역에 대한 현지조사 자료가 아닌, 산스크리트 원전과 일부 인류학적 기존 연구물을 이용한 모노그라프 연구이다. 저자가 서문과 본문에서 언급하고 있듯이, 인도사회에 관한 인류학적 현장연구물이 쏟아져 나오던 1960~1970년대의 학문적 풍토에 비추어보면, ‘문헌적 관점’에 서 있는 이 책의 연구방법은 상당히 ‘낯선’ 것이었다.
옮긴이는 인도사회에 대한 연구를 1989년에 시작했고, 당시 필독서들이라고 소개받은 책들은 스리니바스를 비롯한 베일리, 메이어와 같은 저명한 인류학자들이 현지조사 자료를 이용해 카스트, 친족, 종교에 관한 사회?문화적 현상들을 규명했던 일종의 인류학 민족지였다. 또한 산스크리트 문헌과 현지조사 자료를 토대로 하면서도 힌두 카스트를 관념과 가치로 이해하고자 한 구조주의 인류학자 뒤몽의 ‘위계적 인간’도 빼놓을 수 없는 필독서였다.
당시 인류학적 현지조사에 대한 일종의 ‘맹신’ 수준에 있었던 옮긴이에게 산스크리트로 쓰인 원전을 분석한 비나 다스의 『구조와 인식』은 크게 매력적인 책이 아니었던 것 같다. 박사논문을 위한 장기적인 현지조사를 1991~1992년에 걸쳐 인도 북부 마디야 프라데시의 농촌 마을에서 수행하면서, 많은 종류의 통과의례와 세시의례를 참여 관찰할 수 있었다. 마을 주민은 의례들에서 왼쪽과 오른쪽뿐만 아니라 동서남북의 방위를 지켜가며 의례를 수행하고 있었다. 이런 의미에 대해 질문하면 ‘늘 그렇게 해왔다.’ 또는 ‘선친들이 그랬으니 우리도 이렇게 한다.’는 대답이 일반적이었다. 거의 모든 마을 사람들, 심지어 브라만 사제조차 자신들이 행하는 의례에서 좌우 측면과 기본 방위 및 특정 방향으로 이동하는 행위에 대해 만족할 만한 설명을 하지 못했지만, 그들의 설명에는 ‘나름’ 일관성도 발견되었다.
문헌 연구를 강조하는 인도학 학자들은 산스크리트로 쓰여 있는 힌두 원전들에 인도사회에 대한 ‘진짜’ 지식이 들어 있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산스크리트를 모르는 농민의 의례에는 잘못된 것이 많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인류학자들은 ‘문헌’에만 의존하는 인도학 학자들의 주장에 동의하지 않는다. 인류학자들은 현장에서 관찰 가능한 행위자들의 의례적 행위와 행위에 부여하는 의미를 그들의 시각에서 분석할 것을 강조한다.
이 책의 본문에서 스리니바스는 힌두 농민의 비산스크리트 의례 역시 산스크리트 힌두교에 통합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저자인 비나 다스는 경전에 쓰여 있는 산스크리트 힌두교가 농민들의 힌두교에 그대로 재현될 수는 없지만, 이들의 힌두교 의례에 산스크리트 힌두교의 구조적 변형이 나타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더 나아가 비나 다스는 힌두의 의례적 행위를 적절히 이해하는 방법들로 인지인류학적 연구 방법 외에도, 산스크리트로 쓰인 원전과 같은 문헌들에 대한 분석을 제시하고 있다. 연구 대상사회의 일련의 집합의식의 완결물인 산스크리트 신화에 대한 분석을 통해 개념적 질서에 내재된 원리를 추출함으로써, 산스크리트 힌두교와 비산스크리트 힌두교를 연결지어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옮긴이는 인도 농촌 마을에 대한 현지조사를 마치고 수집된 현지조사 자료를 토대로 농민의례, 특히 죽음의례에 대한 자료를 해석하고자 했다. 이 무렵 다시 읽을 수밖에 없었던 책이 비나 다스의 『구조와 인식』이었다. 금기와 오염의 관념, 측면과 기본 방위의 상징성, ‘삶과 관련된 성’과 ‘죽음과 관련된 성’의 이분화 등, 비나 다스의 주장들을 토대로 현지조사로 수집된 자료를 해석하고자 했고, 이를 토대로 ‘어설프게’ 탈고한 글이 1995년의 『한국문화인류학』에 실린 ?힌두의례와 공간의 상징성?이었다.
2011년 한국연구재단이 공고한 명저번역사업 도서 목록에서 『구조와 인식』을 발견하고, 번역지원서를 제출할지 잠시 망설여졌다. 한 번 읽긴 했지만, 이 책이 ‘다르마란야 푸라나’(Dharmaranya Purana)와 ‘그리히야 수트라’(Grihya Sutra)라는 산스크리트로 쓰인 두 개의 원전에 대한 분석을 주요 내용으로 삼고 있다는 것에 다소 자신감이 서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산스크리트 전공자도 아닌 문외한이 산스크리트 원전을 이용한 연구물을 제대로 번역할 수 있을까 주저되었다. 그러나 산스크리트 문학 전공자가 아닌 인류학과 사회학 전공자조차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저자가 산스크리트 어휘를 로마자로 표기하고 있으며, 아직 ‘턱없이’ 부족하지만 지난 20여 년 이상을 인도사회에 대한 연구를 수행해 왔다는 ‘얄팍한’ 자신감에 기대어 이 책을 번역하기로 결정했다. 번역하는 과정에서 마주치는 종교, 철학, 사상과 관련된 일부 익숙지 않은 산스크리트 어휘들은 관련 전공자의 조언과 문헌연구를 통해 적절히 번역하고자 노력했다. 분량이 많지 않은 단행본이지만 저자인 비나 다스는 책 속에 힌두교와 불교 등의 원전들뿐만 아니라, 카스트와 의례에 관한 기존 사회과학적 논의들을 광범위하게 동원하여 자신의 논지를 주장하고 있다. 따라서 번역하는 과정에서 힌두 카스트와 의례에 관한 주요 논의들을 접할 수 있게 되어, 번역하는 일이 인도사회에 관한 공부를 하게 되는 뜻하지 않은 기회를 얻게 되었다. 인도사회를 전공하지 않는 분들에게 작은 도움이 될까 싶어 필요한 곳에 역자 각주를 달았다. 아직 인도사회에 대한 지식이 일천하여 각주에 한정된 정보만을 제공하고 있는 점을 널리 양해해 주시기 부탁드린다. 되도록 오류를 줄이고자 노력했으나, 오류들이 발견된다면 이 모든 것은 옮긴이의 잘못이라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