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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황현산

성별:남성

국적:아시아 > 대한민국

출생:1945년, 대한민국 전라남도 목포 (쌍둥이자리)

사망:2018년

직업:문학평론가

최근작
2023년 10월 <악의 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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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과 시간의 깊이

나는 분석하기를 좋아하였지만, 심리 비평이나 기호학 같은 '과학적' 방법을 크게 신뢰하지 않았다. 이런 방법들은 모든 것을 분류하고 분류된 것에 단일한 얼굴을 부여한다. 그 밑에 문제는 여전히 남아있고, 게다가 은폐되어 있다. 진정한 분석은 분석되지 않는 것에 이르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 거기에 한 정신의 고통이 있고 미래의 희망을 위한 원기가 있다. 분석하는 사람으로서 나는 그 원기를 사랑하였다. 그러고 보면 나의 분석은 내가 말을 걸고 싶은 작가들에 대한 내 존경과 사랑의 표현이었던 것 같다. 내 글이 비록 부족하지만, 이 존경과 사랑은 아주 늦게라도 전해질 것이라고 믿는다.

밤이 선생이다

문학에 관한 논문이나 문학비평이 아닌 글로는 내가 처음 엮는 책이다. 지난 4년간 한겨레신문에, 그리고 2000년대 초엽에 국민일보에 실었던 칼럼이 주를 이루고 있지만, 지난 세기의 80년대와 90년대에 썼던 글도 여러 편 들어 있다. 결과적으로 삼십여 년에 걸쳐 쓴 글이지만, 어조와 문체에 크게 변함이 없고, 이제나저제나 같은 방식으로 생각하고 있다는 것이 내가 보기에도 신기하다. 발전이 없었던 것 같기도 하고, 그동안 포기할 수 없는 전망 하나와 줄곧 드잡이를 해온 것 같기도 하다. 나는 내가 품고 있던 때로는 막연하고 때로는 구체적인 생각들을 더듬어내어, 합당한 언어와 정직한 수사법으로 그것을 가능하다면 아름답게 표현하고 싶었다. 그 생각들이 특별한 것은 아니다. 존경받고 사랑받아야 할 내 친구들과 마찬가지로 나도 사람들이 자유롭고 평등하게 사는 세상을 그리워했다. 이 그리움 속에서 나는 나를 길러준 이 강산을 사랑하였다. 도시와 마을을 사랑하였고 밤하늘과 골목길을 사랑하였으며, 모든 생명이 어우러져 건강하고 행복하게 사는 꿈을 꾸었다. 천년 전에도, 수수만년 전에도, 사람들이 어두운 밤마다 꾸고 있었을 이 꿈을 아직도 우리가 안타깝게 꾸고 있다. 나는 내 글에 탁월한 경륜이나 심오한 철학을 담을 형편이 아니었지만, 오직 저 꿈이 잊히거나 군소리로 들리지 않기를 바라며 작은 재주를 바쳤다고는 말할 수 있겠다. 문학동네의 편집진과 김민정 시인에게 감사한다. 이 놀라운 재능들이 아니었더라면 이 책은 출간되지 못했거나 어쭙잖게만 출간되었을 것이다. 2013년 6월

밤이 선생이다 (큰활자본)

문학에 관한 논문이나 문학비평이 아닌 글로는 내가 처음 엮는 책이다. 지난 4년간 한겨레신문에, 그리고 2000년대 초엽에 국민일보에 실었던 칼럼이 주를 이루고 있지만, 지난 세기의 80년대와 90년대에 썼던 글도 여러 편 들어 있다. 결과적으로 삼십여 년에 걸쳐 쓴 글이지만, 어조와 문체에 크게 변함이 없고, 이제나저제나 같은 방식으로 생각하고 있다는 것이 내가 보기에도 신기하다. 발전이 없었던 것 같기도 하고, 그동안 포기할 수 없는 전망 하나와 줄곧 드잡이를 해온 것 같기도 하다. 나는 내가 품고 있던 때로는 막연하고 때로는 구체적인 생각들을 더듬어내어, 합당한 언어와 정직한 수사법으로 그것을 가능하다면 아름답게 표현하고 싶었다. 그 생각들이 특별한 것은 아니다. 존경받고 사랑받아야 할 내 친구들과 마찬가지로 나도 사람들이 자유롭고 평등하게 사는 세상을 그리워했다. 이 그리움 속에서 나는 나를 길러준 이 강산을 사랑하였다. 도시와 마을을 사랑하였고 밤하늘과 골목길을 사랑하였으며, 모든 생명이 어우러져 건강하고 행복하게 사는 꿈을 꾸었다. 천년 전에도, 수수만년 전에도, 사람들이 어두운 밤마다 꾸고 있었을 이 꿈을 아직도 우리가 안타깝게 꾸고 있다. 나는 내 글에 탁월한 경륜이나 심오한 철학을 담을 형편이 아니었지만, 오직 저 꿈이 잊히거나 군소리로 들리지 않기를 바라며 작은 재주를 바쳤다고는 말할 수 있겠다. 문학동네의 편집진과 김민정 시인에게 감사한다. 이 놀라운 재능들이 아니었더라면 이 책은 출간되지 못했거나 어쭙잖게만 출간되었을 것이다. 2013년 6월

아폴리네르

문학사적으로 일목요연하게 정리된 설명만을 들여다본다면, 그는 뒤늦은 상징주의자이고 아직 덜된 초현실주의자인 것처럼 여겨진다. 그러나 시인 자신에게로 돌아가 그의 시 작품들을 찬찬히 읽게 되면, 우리의 현대시를 비롯하여 모든 현대시들을 이해하고 논의 할 수 있는 여러 개념과 방법을, 더구나 그 원천을, 거기서 구체적인 형식으로 다시 발견할 수 있다.

잘 표현된 불행

첫 번째 평론집 『말과 시간의 깊이』를 상재했던 것이 2002년의 일이다. 그 이후 10년에 걸쳐 썼던 글 가운데 시와 관련된 평문을 따로 모아 이 책을 편집했다. 그동안 내가 비평에만 전념했던 것은 아니다.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일 가운데 가장 잘할 수 있는 일이 프랑스의 상징주의부터 초현실주의까지의 중요 문헌들을 번역하고 주해하는 작업이라고 생각해왔고, 그래서 그 일을 비평 활동과 병행하다보니 어느 쪽에도 마음을 집중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돌이켜보면, 시가 제 살아 있는 힘을 조용하거나 거침없이 뽐내는 현장의 비평 활동은 수의를 마름질하는 것과도 같은 저 팍팍한 번역·주해 작업에 구체성과 생기를 부어주었고, 거꾸로 이 작업은 저 활동에 숙고의 기회를 마련하고 시에 대한 신뢰를 유지하게 해준 것이 또한 사실이다. 이 비평집은 한국 현대시 발상기의 시인들에서부터 최근의 젊은 시인들에 이르기까지 수십 인의 시인에 대해 때로는 길게 때로는 짧게 말하고 있지만, 그 역사적 조감도를 펼친 것은 아니며, 그 주력 선을 그어낸 것도 아니다. 몇 차례의 기획에 따라 쓴 글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반수 이상의 글이 눈앞에 떨어진 요청(그 주체가 좀 복잡하긴 하지만)에 따라 급하게 쓰였다. 내가 이 비평집의 통일성을 주장하려 한다면 그것은 다른 데서, 말하자면 시와 끊임없이 교섭하였던 내 사고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내 생각이 시에서 벗어난 적은 없으며, 내 삶과 크고 작게 연결된 제반 문제를 시와 연결 지어 생각하지 않은 적이 없다. 나는 늘 시에 대해서 말하고, 시와 말을 하면서, 일상에 쫓기고 있는 한 마음의 평범한 상태가 어떻게 시적 상태로 바뀌는가를 알려고 애썼다. 어떤 사람은 기억 저편으로 사라진 기억을 기억 속으로 다시 불러오는 기술이 시라고 말했지만, 나에게 시는 말 저편에 있는 말을 지금 이 시간의 말 속으로 끌어당기는 계기이다. 시는 모든 것에 대해 온갖 수단을 동원하여 끝까지 말하려 한다. 말의 이치가 부족하면 말의 박자만 가지고도 뜻을 전하고, 때로는 이치도 박자도 부족한 말이 그 부족함을 드러내어 사람의 마음을 움직인다. 능변의 재능을 지닌 사람이 시를 잘 쓰는 것은 그럴 만도 한 일이겠지만, 어눌하게 말을 잇다가 자주 입을 다무는 사람들도 좋은 시를 쓴다. 물을 떠낸 자리에 다시 샘물이 고이듯 시가 수시로 찾아오는 사람도 있지만, 유장한 말이 되기에는 너무 기막힌 생각이나 너무 복잡한 생각을 가진 사람은 마음의 특별한 상태에서 그 생각이 돌처럼 단단한 것이 되거나 공기처럼 숨 쉴 수 있는 것이 되기를 기다린다. 시는 사람들이 보았다고 믿는 것을 명백하게 볼 수 있을 때까지 저를 지우고 다시 돋아나기를 반복하며, 진실한 것이건 아름다운 것이건 인간의 척도로 파악하기 어려운 것에까지 닿으려고 정진하는 시의 용기와 훈련은 우리가 상상했던 것이 이 세상의 것이 될 수 있다는 믿음을, 지극히 절망적인 순간에 그 절망을 말하면서까지도, 포기하지 않는다. 시는 포기하지 않음의 윤리이며 그 기술이다. 이 비평집에 어떤 통일성이 있다면, 그것은 저 시적 상태의 계기와 그 상태의 은총으로만 얻게 되는 정진의 용기를 어느 시에서나 발견하려고 애써온 도정에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제1부에는 시론(詩論)에 해당하는 글들을 모았지만, 현장의 구체성에서 떠나본 적이 없는 사람의 글이라서 원론보다는 시론(時論)의 성격이 더 강하다. 시적 상태의 특별함이 일상의 범속함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으며, 문학이 어떻게,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가를 알려고 노력한 가운데 쓴 글들이다. 제2부는 작고한 시인들에 관해 쓴 글들을 모았다. 그 가운데 많은 시인들은 벌써 문학사에서 특별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이 평문들은 그들의 작품과 생애 전체를 평설하는 일보다는 새로운 관점을 모색하는 데 초점을 모았다. 제3부는 지금 이 땅에서 쓰이는 시들을 따라가며 쓴 글이다. 말 그대로 현장비평이다. 많은 글들이 시집에 따라붙는 해설의 형식으로 쓰였지만, 중요한 시집이나 시편이 발표되었을 때 자청해서 쓴 글들도 있다. 현장에서 약동하는 재능의 박력을 중시하면서도 일정한 비평적 거리가 유지될 수 있기를 바랐다. 한편 여기서 다룬 시인들 가운데 타계한 시인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해당되는 평문은 그의 생전에 쓴 것이기에 여기 넣어 두었다. 제4부는 한 잡지사의 기획에 따라, 작고 한 시인들의 작품을 중심으로 난삽하거나 논의가 엇갈리는 시들을 골라 내가 독서한 바를 기술한 글들이다. 해당 시편들에 대한 ‘독서’라기보다는 ‘하나의 독서’에 해당한다고 해야겠으나, 때로는 제1부에서 말한 문학 존재론의 탐구와도, 제2부에서 말한 새로운 관점의 모색과도 연결되는 점이 없지 않다. 나는 시를 강의하면서 가끔 엉뚱한 질문을 받는다. 그런 질문은 대체로 ‘시를 잘 모르는 학생’에게서 나온다. 그러나 나는 그 질문에 응해 재차 삼차 설명을 하다보면 내 설명체계에 약점이 있다고도 느끼게 되고, 그 약점이 내가 물려받아 사용하고 있는 ‘코드’에서 기인하다고도 생각하게 된다. 시를 잘 안다는 것이 시에 대한 설명의 ‘코드’에 익숙하다는 것에 지나지 않을 때가 많다. 내가 ‘코드’에서 해방될 수 있었다면 그것은 시가 본래 지닌 힘에 의해서일 뿐이다. 어느 일에서나 마찬가지로 시를 읽는 일에서도 마음을 비우는 연습이 중요하다는 점을 지난 10년 동안 여기 실린 평문들을 쓰면서도 다시 확인하게 된 것이 또 하나의 수확이겠다. 문예중앙과 그 편집진들에게 감사드린다. 이 비평집의 편집을 도와준 권혁웅 교수와 조재룡 교수에게도 뜨거운 마음을 전한다. 2012년 1월

잘 표현된 불행

내 생각이 시에서 벗어난 적은 없으며, 내 삶과 크고 작게 연결된 제반 문제를 시와 연결지어 생각하지 않은 적이 없다. 나는 늘 시에 대해서 말하고, 시와 말을 하면서, 일상에 쫓기고 있는 한 마음의 평범한 상태가 어떻게 시적 상태로 바뀌는가를 알려고 애썼다. 어떤 사람은 기억 저편으로 사라진 기억을 기억 속으로 다시 불러오는 기술이 시라고 말했지만, 나에게 시는 말 저편에 있는 말을 지금 이 시간의 말속으로 끌어당기는 계기이다. 시는 모든 것에 대해 온갖 수단을 동원하여 끝까지 말하려 한다. 말의 이치가 부족하면 말의 박자만 가지고도 뜻을 전하고, 때로는 이치도 박자도 부족한 말이 그 부족함을 드러내어 사람의 마음을 움직인다. 능변의 재능을 지닌 사람이 시를 잘 쓰는 것은 그럴 만도 한 일이겠지만, 어눌하게 말을 잇다가 자주 입을 다무는 사람들도 좋은 시를 쓴다. 물을 떠낸 자리에 다시 샘물이 고이듯 시가 수시로 찾아오는 사람도 있지만, 유장한 말이 되기에는 너무 기막힌 생각이나 너무 복잡한 생각을 가진 사람은 마음의 특별한 상태에서 그 생각이 돌처럼 단단한 것이 되거나 공기처럼 숨쉴 수 있는 것이 되기를 기다린다. 시는 사람들이 보았다고 믿는 것을 명백하게 볼 수 있을 때까지 저를 지우고 다시 돋아나기를 반복하며, 진실한 것이건 아름다운 것이건 인간의 척도로 파악하기 어려운 것에까지 닿으려고 정진하는 시의 용기와 훈련은 우리가 상상했던 것이 이 세상의 것이 될 수 있다는 믿음을, 지극히 절망적인 순간에 그 절망을 말하면서까지도, 포기하지 않는다. 시는 포기하지 않음의 윤리이며 그 기술이다. 이 비평집에 어떤 통일성이 있다면, 그것은 저 시적 상태의 계기와 그 상태의 은총으로만 얻게 되는 정진의 용기를 어느 시에서나 발견하려고 애써온 도정에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 책머리에

황현산의 사소한 부탁

박새를 민간에서는 흔히 머슴새라고 부른다. 저녁 어스름이나해가 뜰 무렵에 이랴낄낄! 이랴낄낄! 소를 몰아 밭 가는 소리로 크게 울어대기 때문에 붙은 별칭이다. 옛날에 한 머슴이 혹독한 주인 밑에서 일을 했다. 주인은 머슴에게 밤낮으로 쉴 틈 없이 일을 시켰다. 낮에 밭을 간 머슴에게 밤에도 밭을 갈게 했다. 머슴은 지쳐 쓰려져 죽었다. 죽어서 머슴새가 된 머슴은 지금까지도 어스름 저녁과 어스름 새벽에 소를 몰아 밭을 간다. 그런데 살아서 그 고생을 하던 머슴은 왜 죽은 뒤에까지도 그 고생을 계속해야 하는 것인가. 이제 그 고통스러운 세상에서 육신이 해방되었으니 혼이라도 편안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이 질문은 자못 엄숙하다. 인간의 운명을 그 핵심에서 묻는 것이기 때문이다. 프랑스의 시인 보들레르는 19세기 중엽에 우리와 똑같은 질문을 했다. 파리 센강 변에 즐비하게 늘어선 고서점의 고서 더미에서 보들레르는 신기한 그림 한 장을 발견한다. 인체의 골격을 보여주기 위한 이 해부도는 앙상한 해골만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다. 화가는 그림에 제 생각 하나를 덧붙여, 해골이 그 골격을 곧추세워 밭을 갈고 있는 모습을 묘사했다. 벌써 저 세상의 몸이 된 이 해골에게도 아직 이 세상의 고생이 끝나지 않은 것이다. 두 개의 시로 되어 있는 이 시의 뒷부분을 약간 길지만 그대로 인용한다. 서글픈 체념의 촌놈들아, 너희들의 등뼈나 껍질 벗겨진 그 근육의 온갖 노역으로, 파서 일구는 그 땅으로부터, 말하라, 납골당에서 뽑혀온 죄수들아, 어떤 괴이한 추수를 끌어낼 것이며, 어떤 농가의 광을 채워야 하는가? 너희들 (너무도 혹독한 운명의 무섭고도 명백한 상징!), 너희들이 보여주려는 바는, 무덤구덩이에서마저 약속된 잠이 보장된 것은 아니며, 허무가 우리에게 등돌리는 배반자이며, 모든 것이, 죽음마저, 우리를 속인다는 것이며, 슬프다! 영원무궁 변함없이, 우리는 필시 알지 못하는 어떤 나라에서 거친 땅의 껍질을 벗겨야 하며 우리의 피 흐르는 맨발로 무거운 보습을 밀어야만 한다는 것인가? 해골들은 벌써 죽음의 세계, 허무의 세계에 들었지만, 죽음과 함께 영원한 휴식을 얻게 되리라는 약속은 실현되지 않았다. 그들은 여전히 우리가 모르는 어떤 나라에서 “거친 땅의 껍질을 벗겨야 하며”, 피 흐르는 맨발로 보습을 밀며 노역해야 한다. 그들은 죽음 뒤에까지도 영원히 험한 노동을 해야 하는 것이다. 이 부당한 처사에 대해 우리는 왜 입을 다물고 있는가. 그것은 우리들 자신이 고생하는 자는 영원히 고생하게 되어 있다고 믿는 “서글픈 체념의 촌놈들”이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평소에 염두에도 두지 않았던 이런 모순에 갑자기 의문이 생기는 순간을 나는 문학적 시간이라고 부른다. 문학적 시간은 대부분 개인의 삶과 연결되어 있기 마련이지만, 사회적 주제와 연결될 때 그것은 역사적 시간이 된다. 그것은 또한 미학적 시간이고 은혜의 시간이고 깨우침의 시간이다. 나는 이 세상에서 문학으로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가를 오랫동안 물어왔다. 특히 먼 나라의 문학일 뿐인 프랑스 문학으로 그 일을 할 수 있는지 늘 고뇌해왔다. 내가 나름대로 어떤 슬기를 얻게 되었다면 이 질문과 고뇌의 덕택일 것이다.『밤이 선생이다』『우물에서 하늘 보기』 이후에 썼던 글을 묶은 이 책은 다른 책들과 마찬가지로 그 고뇌의 어떤 증언이기도 하다. 난다의 김민정 시인에게 깊은 감사를 드린다. 2018년 초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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