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해 전 통신회사 노동조합을 취재한 적이 있다.
취재라고 하면 거창한 것 같지만 내가 한 일은 그곳에 계신 분들의 이야기를 듣고 그분들의 일상을 짧은 시간 멀찌감치에서 지켜본 게 전부였다.
당시엔 내가 어떤 소설을 쓰게 될지, 쓸 수 있을지 알 수 없었다.
어쩌면 이 소설은 그분들과는 무관한 어떤 이야기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일에 대한 이야기이거나 혹은 일하는 사람에 대한 이야기라고 말할 수 있겠지만 그보다는 그 둘 사이를 채운 어떤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이야기라고 하는 게 더 적절한 설명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소설을 쓰는 동안에는 뭔가를 쓰는 일이 나를 어떻게, 얼마나 바꿔놓을지에 대해 자주 생각했다.
몇 해 전 통신회사 노동조합을 취재한 적이 있다.
취재라고 하면 거창한 것 같지만 내가 한 일은 그곳에 계신 분들의 이야기를 듣고 그분들의 일상을 짧은 시간 멀찌감치에서 지켜본 게 전부였다.
당시엔 내가 어떤 소설을 쓰게 될지, 쓸 수 있을지 알 수 없었다.
어쩌면 이 소설은 그분들과는 무관한 어떤 이야기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일에 대한 이야기이거나 혹은 일하는 사람에 대한 이야기라고 말할 수 있겠지만 그보다는 그 둘 사이를 채운 어떤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이야기라고 하는 게 더 적절한 설명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소설을 쓰는 동안에는 뭔가를 쓰는 일이 나를 어떻게, 얼마나 바꿔놓을지에 대해 자주 생각했다.
소설을 쓰는 동안엔 다른 누군가를 이해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이해라는 말 속엔 늘 실패로 끝나는 시도만 있다고 생각한 기억도 난다. 그럼에도 내가 아닌 누군가를 향해 가는, 포기하지 않는 어떤 마음들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쩌면 이 소설도 끈질기게 지속되는 그런 수많은 노력 중 하나가 아니었는지.
오래전 부모님이 처음 샀던 집의 주소를 나는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 그 집의 구조도, 그 동네의 풍경도, 사람들의 모습도 신기할 정도로 또렷하다. 당시 내 나이가 대여섯 살 정도였으니까. 그 후 여러 차례 이사를 했고, 이사한 후에는 이전 집 주소를 까맣게 잊어버리면서도 왜 그 집 주소만은 이토록 잊히지가 않는 것인지에 대해 생각한 적이 있다. 한번쯤 그 동네에 들러볼 수 있지 않을까 싶은데도 한 번도 그러지 못했다. 그곳이 여전히 그대로인 것도, 어떤 식으로든 바뀌고 변한 것도, 아직은 보고 싶지가 않은 탓이다. 어쩌면 이 소설은 나조차도 알 수 없는 그런 마음들에 대한 답을 찾으려는 노력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지난해에는 책 만드는 사람들이 쓴 책을 찾아 읽었다.
가벼운 호기심에서 출발한 그 독서가 왜 뭔가 쓰고 싶은 마음을 불러왔는지 모르겠다. 마음에 와닿은 뭔가가 있었을 것이다. 진심이랄지, 열심이랄지. 이렇게 단어로 적고 나면 시시해지고 마는, 일하는 모습에 가려 좀처럼 보이지 않는 어떤 것들. (…) 평범한 사람들이 매일같이 해내는 가능하지 않은 일이 편집 하나만은 아닐 것이다. 그럼에도 책을 읽고 만드는 일상이 주는 울림이 컸다. 그렇게 보면 이 소설은 그동안 내가 읽어온 책들에 대한 독후기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2025년 가을
모든 이야기는 한 지점에서 다른 지점으로 흐른다. 그리고 그 방향과 속도에 따라 각기 다른 흐름이 만들어진다. 어디로, 어떻게, 얼마나 흐르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이야기가 되는 것이다. 모든 이야기는 느닷없이 방향을 틀고 예상치 못한 지점을 통과하며 의외의 지점에 다다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