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들의 지속적인 관심 덕분에 - 개정하지 않은 부분도 있지만 - 업데이트된 네 번째 개정판을 발행할 수 있었다. 불교학은 세계 각국에서 발전하고 있으며, 그중에서도 최근 나카무라 교수의 『인도불교』(Delhi, 1987)에서 연구한 몇몇 문헌조사가 주목할 만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 진행하고 있는 많은 연구들은 일부 불교학파와 나라별 전통에서 이해하는 방식대로 고대의 문헌을 출판 혹은 해석하고 있다. 이처럼 불교를 이해하는 데 있어 오래된 국가적 교리나 새로운 해석이 추가되어 왔으며, 새로운 관념이나 방법론 역시 제시되었다. 하지만 남방이나 북방의 전통 교리도 아니고 마르크스주의나 실증주의의 개념도 아닌 새로운 해석의 등장은 역사적 진위를 확인하는 데 방해가 될 수도 있다.
올덴베르그(Oldenberg)로부터 호너(I.B. Horner)까지 이어져 온 불교에 대한 역사적 비평의 저서들은 빠알리(P?i) 경전이 상대적으로 더 고대의 것임을 인지하고, 이것이 초기불교를 이해하는 데 고유한 가치를 지녔음을 확인하는 토대가 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사실은 북방 전통에서 찾은 반대주장에 의해 논박당하거나 간과 혹은 축소되어 왔다. 북방 전통은 거의 다 유실된 인도 원전(原典)의 한역본과 티베트 번역본을 따르는 것이 대부분이다. 게다가 산스크리트나 쁘라크리트로 된 경전 중 일부분이 발견되긴 했지만 애가 탈 정도로 적은 양이다. 고대의 한역본 역시 훨씬 뒤에 번역된 티베트 번역본만큼이나 의역(意譯)이 되어 있다. 이러한 상황으로 미루어 볼 때 초기불교의 역사에 대한 최고의 단서는 여전히 빠알리 경전에 있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다.
붓다는 자신의 가르침이 제자들의 언어로 기억되는 것을 허용했다. 따라서 다양한 부파에서 다양한 표현으로 경전 전통이 발달하는 것은 불가피했을 것이다. 방대한 확장 안에서 테라와다(Therav?in, 上座部)의 빠알리 경전만이 온전히 보존되어 왔다는 사실은 어쩌면 역사적 우연에 불과할는지 모르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붓다의 삶과 가르침을 일별(一瞥)할 수 있는 유일한 창구가 되어 주는 것도 사실이다.
물론 테라와다 불교를 초기불교로 여긴다거나 빠알리 경전을 붓다의 직설(Bhuddhavacana, 붓다의 敎說)로 간주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다만, 붓다의 직설을 찾아내기 위한 어떤 계획이든 빠알리 경전에서 발견되는 내용에 더욱 의지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후대의 마하야나(Mah??a, 大乘) 문헌에서 언급하고 인용하는 내용들 역시 붓다의 직설 중 일부일 수도 있는 몇 가지 경전이나 빠리야야(pary?a, 分別)를 보여주고 있다. 하지만 이들은 오히려 빠알리 경전의 가치를 확실히 해주고 있을 뿐이다. 빠알리 경전의 문구들과 한역 또는 산스크리트 경전의 문구들을 비교했던 시도를 통해, 이들이 서로 다르게 구성된 모음에 존재했고, 주제나 의도, 개념, 환경적 배경에서는 포괄적으로 유사한 반면에 내용의 일부가 상당히 추가되거나 수정되어 왔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예를 들어, 『대반열반경』은 상당 부분 개정되긴 했으나 까뜨야야나(K?y?ana, 迦?延)에 대한 가르침은 다른 버전들 사이에서도 본질적 동일성이 있음을 보여준다.
빠알리 경전과 다른 버전의 문구를 비교하는 작업은 붓다의 직설에서 아비다르마(Abhidharma, 論藏)와 같은 부파불교의 경전, 즉 후대 불교 문헌의 상당 부분을 제외시키는 데 도움이 된다. 불멸 후 200년 이내에 부파가 생겼다면, 특정 부파의 성향을 띠지 않는 근본적인 경전 내용들은 불멸 후 1세기에 해당되어야 한다. 하지만 이런 내용들 역시 순수한 붓다의 직설이 아니라 그 당시 수행 전통을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을 뿐이다. 결과적으로 붓다의 직설을 찾기 위해서는 빠알리 경전에서 가장 오래되고 완벽한 모음을 찾고, 가능한 한 비판적으로 검토하고, 시대를 구분하는 것이 유일한 방법이라는 결론에 도달한다. 신앙적 정통이나 전통적 빠알리 학파의 정통성이 이런 과업을 방해하도록 내버려둬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본서의 방법론은 전통적 빠알리 학파든 일본이나 티베트 학파든 모든 전통적 입장에 거리를 두고 접근을 시도하고자 하였다. 중국·티베트·일본 자료를 연구하는 일부 연구자들이 빠알리 경전이 상대적으로 더 오래되었다는 데 의문을 제기한 것이 사실이지만, 마찬가지로 과거에 히나야나(H?ay?a, 小乘) 부파에서 마하야나(Mah??a, 大乘) 경전의 진위에 의문을 제기하기도 했다. 이런 논쟁은 - 『쿳다까니까야(Khuddaka Nik?a, 小部)』의 몇 가지 내용을 제외하고 - 어느 부파에도 속하지 않는 아소카(A?ka) 왕 이전의 첫 번째와 두 번째 삐따까(Pi?ka, 經藏·律藏)의 특징을 충분히 계산하지 못했기에 나타난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맥락에서 결집의 역사적 시기로서 붓다의 열반(Nirv??, 涅槃) 시기를 바라보는 관점을 중요하게 고려해야 한다. 최근에 2차 결집 이전에 100년이 흘렀다는 이유로 붓다의 열반 시기를 기원전 4세기로 추정하는 오래된 관점이 다시 유행하고 있으며, 이들은 2차 결집이 아소카왕 시대에 진행되었다고 믿고 있다. 이런 오해는 아소카와 칼라쇼카 카카바르니(K???ka K?avar?)를 혼동한 것으로, 반열반(Parinirv??, 般涅槃) 후 218년에 아소카의 대관식이 열린 것을 기록하는 스리랑카 전통을 통해 충분히 반박되었다. 고고학 증거를 토대로 - 물질적 발달의 연대 순서를 활용함으로써 - 붓다의 시대를 결정하려는 시도는 물질적 삶이 자각하지 못하는 방식으로 가설만을 내세우는 셈이 된다. 장기간에 걸쳐 변화했던 시간 안에 불과 100년이라는 차이로 한정된 결정을 내리는 것은 지나친 판단이다. 고고학적 증거에 한정하여 불교 사회의 연대를 정확히 추론한다는 것은 너무나 모호하다. 초기 경전에서 나타나는 사회적 특성은 과거와의 단절이라고 보기 어려우며, 반드시 마우리아 왕조 시대에 위치해야 할 필요도 없다.
마찬가지로, 불교의 발생을 농업·무역·도시가 발생하거나 또는 카스트 계급 사회가 출현함으로써 가나(ga?)라는 오래된 씨족이 붕괴되는 것과 같은 사회적·경제적 변화와 연결시키고자 시도했다. 하지만 붓다의 가르침 혹은 초기불교와 그러한 사회·경제적 조건의 연관성은 충분한 증거가 부족할뿐더러 그들 사이에는 타당한 인과관계도 보이지 않는다. 철학이나 실증주의 사회학에서 비롯된 일종의 사회적 결정주의라는 맥락 안에 한정하여 정신적 교리나 움직임을 설명하려는 시도는 그럴듯해 보일 수 있다. 물론 사회적 저항 또는 반대운동을 설명한다는
오해를 받을 수도 있다. 하지만 불교는 사회적 집단이나 저항에 대한 특정의 목소리로 발생하지 않았다. 불교는 실존적 괴로움을 없애는 데 관련된 도덕적·정신적 진리를 새롭게 발견한 것이다. 따라서 인류 모두에게 호소한 것이었다. 불교는 진리를 선포하는 보편적 메시지이다. 이러한 주장에 대해 회의적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와 같은 회의적 입장은 종교에 대해 대체 가능하면서 불가피하게 추론적이거나 교리적인 이론을 전제하고 있다. 따라서 본서는 증거에 대한 객관적인 역사, 비평적 평가에 국한시켜 진행하고자 한다.
브라흐마나(Br?ma?, 婆羅門)와 슈라마나(Saman, 沙門)라는 두 갈래의 기본 개념은 권위 있는 학자들에 의해 상세한 설명이 부가되고 증명되어 왔다. 그 과정에서 초기불교는 나이라트미야(nair?mya, 無我) 개념에 대해 더 많은 논의를 이어갔다. 일부 비판적인 학자들은 안앗따(Anatta, 無我)에 대해 자아에 대한 생각 아래 깊게 깔려 있는 모든 정신적 혹은 초월적 실체를 단순히 부정(否定)한 것이라는 관점을 지지했다. 이러한 이해는 초기 경전의 증거에 모순될 뿐만 아니라 불교 교리의 구조 내에서도 심각한 모순을 야기하는 것이라 확인할 수 있다.
이처럼 초기 부파의 역사와 교리에 대한 많은 연구가 진행되어 왔지만, 본서의 결론에는 크게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이러한 부분에 대해서는 나의 다른 작업에서 자세히 검토했다.
특별한 친구인 빅쿠(Bhikkhu) 빠사디까(Paaika) 박사님과 존경하는S. 린포체(Rev. S. Rinpoche) 님께 감사함을 표시하고 싶다. 이분들은 내가 빠르게 변화하는 불교 교학의 흐름을 따라갈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이 책에 지속적인 관심을 보여주는 모티랄 바나르시다스(Motilal Banarsidass) 출판사에도 은혜를 입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