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에 모은 글들은 근래에 내가 관람한 각종 음악회, 전시회, 연극, 영화, 무용발표회 등에 대한 소감을 적은 것이다. 이런 종류의 개인적인 관객 일기를 굳이 책으로 엮어 다른 사람에게 읽힐 필요가 있을까 하는 생각도 있었지만, 시간이 지나면 흩어지고 잊혀질 기억의 편린들을 정리해두는 일도 필요할 것 같아서 책으로 묶어두기로 한다. 이 글들은 전문적인 예술비평도 아니고 문화비평적 평설도 아니다. 한 사람의 순수한 딜레탕트로서 내 나름의 예술 감상에 대한 느낌을 정리한 것이다. 지성과 감성, 비평적 감별력과 아마추어적 취미 생활이 어우러진 우리 시대의 예술현장 답사기라 할 수 있다. (중략)
최근 몇 해 동안은 부지런히 각종 공연을 보러 다니는 일을 주로 하였다. 이 일은 단순히 남아도는 시간에 인생을 즐기는 교양인의 호사 취미는 아니었다. 한 사람의 시인으로서 인접 장르의 예술적 표현 방식에 관심이 있었고, 현대예술의 특성과 방향을 체험하고 전통미학의 계승과 재창조가 오늘의 우리 문화에서 이룩한 성과를 엿보는 일이 즐거웠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각종 공연이나 전시회를 감상하는 일에서 내면적 행복감을 느끼고 만족감을 느꼈기 때문이다.
밝음과 맑음, 공손함과 순함이 있는 다른 세상에 관하여 자주 생각해 본다. 바다 밑 같은 고요와 큰 나무 그늘과 같은 안온함이 있는 세상은 자유롭고 넉넉할 것 같다. 지상에서 그런 시간이나 공간을 만나는 일이 가능하기는 할 것인가? 먼지와 때와 얼룩이 가득한 일상의 삶을 넘어서는 길의 하나는 그런 시를 쓰는 일이다.
이 책은 지난 10여 년간 여러 잡지나 문학 행사에 기고한 산문들을 모은 것이다. 대학에서 정년을 맞이한 후 본격적인 학술 논문에는 손대지 않았고, 대신 편히 읽을 만한 에세이를 쓰는 일에 관심을 가졌다. 시인으로서 시 쓰는 일이 주업이라면, 산문 쓰는 일은 부업에 해당한다는 생각을 가졌다. 에세이는 시보다 더 솔직하고 편안하고 전달력이 강하며 그만큼 호소력이 있다.
제1부의 글들은 주로 『참 소중한 당신』 『야곱의 우물』 등 가톨릭 관계 잡지에 연재했던 짧은 에세이들이다. 삶의 여러 현장에서 만나게 되는 단편적 인상에서 존재의 비밀을 찾아 음미해보는 글이어서 나름대로 의미 있는 읽을거리라 할 수 있다. 영혼의 울림과 존재의 신비를 탐색하며 비움과 맑음과 양심의 소리에 귀 기울이는 것은 귀하고 소중한 시간이다. 문학적 수사에 치중하기보다는 주제를 진지하고 평이하게 전달하기 위해 힘썼다.
제2부의 글들은 각종 문예지나 문학 행사에서 발표하였던 것으로 한국 현대시에 대한 필자의 소신을 밝힌 글들이다. 시와 교양의 정신, 한국 시와 생명 사상, 한국 시와 이웃 장르의 만남 등에 관한 생각을 엿볼 수 있다. 시와 음악에 관한 접합 문제, 디지털 시대의 문학적 대응에 관한 글도 보태었다. 진지하고 정직한 자세로 현실과 사물을 한 걸음 비켜서 바라보는 고독한 초월의 자세가 시인의 자세라야 한다는 생각, 폭넓고 깊이 있는 문화적 교양의 필요성이 오늘의 우리 시단에 꼭 필요한 덕목이라는 생각을 피력한 글들이다. 제3부의 글은 나의 문학과 인생에 관한 회고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