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정판 시인의 말
첫 시집은 첫째, 내 시쓰기의 영도, 내 시의 DNA다.
그러므로 둘째, 첫 시집을 봉인해두라. 첫 시집은 모든 그다음 시집들을 위한 금기이다. 첫 시집은 이렇게 말한다: "함부로 나를 열지 마라. 여는 순간, 돌이킬 수 없는 길을 얼마나 멀리 갔는지 그리고 멀리 간들 빙빙 맴도는 평행시우주(詩宇宙)임을 네 두 눈으로 똑똑히 보게 될지니……"
그래서 셋째, 못 잊을 첫 시집이라지만 못 잊어서는 안 되리. 시인이 자기 시집을 읽는다는 건, 더욱이 자신의 첫 시집을 읽는다는 건 멜로이기 이전에 스릴러이다. 적어도 내게는 그렇다.
그런데 넷째, 첫 시집은 어떤 식으로든 꼭 다시 돌아온다. 망령으로든 시혼으로든, 애착으로든 통점으로든, 자랑으로든 한계로든……
첫 시집을 두 번(째로) 내게 됐다. 첫 번 냈을 때처럼 ‘발굴된’ 느낌이다. 그 자리에 겸상해야 하는 쑥스러움만 아니라면 이 시집이 세상의 식탁에 어엿이 새로 올려지게 된다니, 더없이 기쁘고 감사할 따름이다. 오, 가엾은 첫 시집이여! 다시 한번 세상 속으로 들어가라. 처음 그때보다 당당히 기를 펴고 네 언어들이 가고 싶어했던 만큼 갈 때까지 멈추지 말아라.
2021년 6월
“어느 날 한 권의 책을 읽었다
그리고 나의 모든 인생이 바뀌었다”
오르한 파묵 소설 『새로운 인생』의 첫 문장처럼,
“어느 날 한 편의 시를 썼다.
그 후 나의 모든 인생은 바뀌었다”
그리고 나는 지금도 시를 쓴다. 생애 세번째 시집이다.
시집을 낼 때마다 나는 나 자신이, 또한 시가, 달라지기를 바란다.
1999년 9월
6년 만에 내는 시집이다. 꽤나 오래 묵은 느낌이다.
나는 늘 시를 쓰고 있었지만 세상은 그것을 모르고 있었을 듯하다.
시집을 내지 않은 6년 동안-정확히는 이전 시집의 시효 내지 유통기한에 다다른 2~3년 동안-시집을 내지 않는다는 것은 시를 쓰지 않는다는 것과 동의어이며, 한 명의 시인이 세상에서 잊혀져간다는 것과 동의어일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어차피 시인이란 세상에서 잊혀져 있다가 시가 그를 깨우고 세상이 그를 부르면 비로소 돌아오는 유객(幽客) 아니랴. 잊혀지는 듯하다 다시 돌아오고 잊혀졌다가도 끝내 되돌아오면서, 그 부침(浮沈)조차 되레 낙을 삼아 이 한세상 유유히 흘러갈 줄 알아야 시인다움 아니겠는가. 이런 유의 내밀한 기쁨이랄까, 은밀한 자족이랄까 하는 것을 나는 이 시집을 눈앞에 둔 지금 누리고 있다.
사실 6년은 한 권의 시집을 준비하기에 지나치게 긴 세월인 것도 아니며 하물며 10년보다는 훨씬 짧은 시간인 것을. 그러나 아, 패스트푸드만 횡행하는 것이 아닌 패스트 라이프! 속도전이라는 듯 생은 하도 빨리도 가니 더딘 몸과 마음이 분주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