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학원 경영의 매력이 무엇이길래 지금까지
사랑에 빠져 있는 것일까”
학원인 난중일기 : 2020년은 어떻게 기억될까
들떠 있었다. 좋은 일이 있으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목표를 세웠고 성취하리라 주먹을 불끈 쥐었다. 2020년이 시작되기 전 우리들의 모습이었다. 2020이라는 숫자가 주는 경쾌한 느낌에 매료되었다. 학원 경영 20년이 된 내게는 더 애착이 가는 해였고 영어 프랜차이즈 회사 설립을 구체화시키기로 다짐을 거듭했다.
막상 새해가 시작되자 우리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코로나19’라는 신종 바이러스였다. 학원을 운영하면서 네 번의 전염병(신종플루, 사스, 메르스, 코로나)을 겪었지만 이번 사태가 가장 심각하다. 개학이 수차례 연기되면서 결국에 온라인 개학이라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졌다. 눈과 귀로 많이 접하는 단어는 ‘사회적 거리두기’, ‘기침예절’, ‘코로나 예방수칙’ 등이다. 재난 영화에서나 봤음직한 장면이 현실에 등장했다. 혼란의 시기가 길어지며 학원 운영자 및 자영업자들의 시름이 깊어졌다. 어린 학생들을 대상으로 하는 학원이기에 규제가 엄격했고 강력 휴원 권고 방침이 연이어 내려졌다. 학원인의 심장에는 타이타닉호도 가라앉힐 무거운 추가 매달려 있다. 이 위태로운 시기를 이겨 낼 수 있는 힘은 학원 경영의 기쁨과 학원 창업의 뿌리 깊은 동기에 있다.
학원 경영의 기쁨
학원인으로서 ‘성공’의 척도가 으리으리한 인테리어와 수천 명의 학생 수를 말한다면 나는 성공을 말할 수 없다. 아직은. 그 기준이 ‘좋아하는 일을 하며 사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가?’에 대한 것이라면 나는 누구보다 성공했다. ‘강한 자가 살아남는 것이 아니라 살아남는 자가 강하다.’ 언뜻 말장난 같은 이 말이 20년 학원 운영을 해 온 나에겐 큰 의미를 준다. 할 것 없어 마지못해 버틴 것이 아니다. 힘듦보다 기쁨이 더 커서 살아남았다. 아침에 눈을 뜰 때마다 하고 싶은 것이 한 가지씩 늘어났다. 꿈 많은 흙수저는 남들보다 모험을 즐길 줄 알아야 하더라. 많은 역경을 겪을 테니까. 어떻게든 스스로 헤쳐 나가야 하니까.
‘길바닥에 나앉아도 좋으니 꼭 학원을 차릴 거야.’
하고 싶다는 이유 하나로 월세 보증금까지 탈탈 털어 시작했다. 열 손가락이 짓무르도록 전단지를 접었다. 수업 마치고 야밤에 누가 볼까 집집마다 우편함에 급히 넣느라 발이 접질려 넘어지길 수차례. 전봇대의 전단지가 무사한가 걱정되어 잠 못 자고 새벽같이 일어나 잘 붙어 있는 것을 보고서야 두어 시간 눈을 붙일 수 있었다. 20대의 순수했던 열정만 그득했다면 20년 동안 지속할 수 없었다. 학원 경영의 매력이 무엇이길래 지금까지 사랑에 빠져 있는 것일까. 앞으로도 이십 년은 더 함께 하고 싶은 것일까.
첫째, 학원 운영의 가장 큰 묘미는 끊임없이 일어나는 ‘배움의 선순환’이다. 학생들이 꿈과 목표를 이룰 수 있게 도와주는 일은 보람차다. 씨앗이 자라는데 필요한 토양, 물, 비료를 먼저 공부해서 가장 좋은 것을 주고 싶다. 새싹이 나고 열매를 맺기까지 기다리고 보살펴 주는 과정에서 원장, 강사, 학생이 서로 배우고 성장한다. 몰랐던 것을 알았을 때의 그 느낌이 얼마나 짜릿한지 우리 모두 알고 있다. 나는 그 끊을 수 없는 강렬한 맛을 매일 맛본다. 왜 다른 데 한눈팔겠는가? 너무 좋은데.
둘째, 사계절이 뚜렷하듯 학원의 일 년은 매 달마다 업무적 특징이 있어 역동적이다. 내신 대비, 모의고사, 두 번의 신학기와 방학, 철철이 행사 준비로 스무 해 동안 지겨워서 시계를 본 적 없다면 믿을 수 있을까. 다이내믹한 업무를 처리하는 만큼 성취감도 크다. 새벽시장의 활기처럼 팔딱팔딱 살아 숨 쉬는 활어 같은 일터가 바로 학원이다.
셋째, 먹고 먹히는 살벌한 경쟁 사회에서 순도 100프로의 동심을 만날 수 있다. 갖가지 트러블로 날이 서 있다가도 여덟 살 아이가 건넨 ‘선생님 사랑해요.’ 쪽지를 보며 미소 지을 수 있다.
넷째, 유치원생부터 육십 대까지 다양한 연령대의 사람들과 지속적으로 교류할 수 있다. 10대 전후 학생, 20~50대 강사, 30~50대 학부모, 20~60대 학원 사업자들과 소통한다. 연령대 상관없이 대화를 편히 즐길 수 있는 것은 이런 환경과 관련이 깊다.
마지막으로, 학원 경영은 교육 전문가로서의 보람, 사업가로서의 도전과 성취 그리고 자기 계발의 원동력을 제공해 주는 매력적인 일이다. 내 개성을 살려 일할 수 있고 노력한 만큼 벌 수 있다. 창업과 은퇴 시기도 내가 정할 수 있는 평생 직업이다. 학령인구 감소와 인공지능 시대 도래로 우려의 목소리도 있지만 세분화, 전문화된 1인 학원 형태의 성장은 지속될 것이다. 창업자의 주연령대는 3040이지만 2060까지 넓게 분포되어 있고 50대 창업자도 증가 추세이다. 신중년 고학력 세대의 창업은 더욱 활발해질 것이다.
중학생 소녀가 ‘경영’과 ‘영어 티칭’에 매료된 사연
‘내 인생 내가 경영할 거야. 남에게 휘둘리고 싶지 않아.’
6학년 가을, 집이 한순간에 사라졌다. 사춘기를 겪으며 ‘경영’이라는 것에 점점 빠져 들었고 그것은 내 인생철학이 되었다. 가족과 헤어져 살다 중1 때 부산으로 전학을 갔다. 말씨가 다르다는 이유로 구경거리가 되었다. 급격한 환경 변화로 실어증에 걸린 듯 말을 하지 않았다. ‘서울내기’에 이어 ‘벙어리’라는 별명 하나가 추가되었다. 수업 중에 갑자기 눈물을 쏟았다. 그걸 본 친구의 손에 이끌려 교회를 다녔다. 일요일에 예배를 마치면 점심으로 라면이나 국수를 주셨는데, 처음엔 그래서 다녔다. 반찬 없는 밥을 한 끼만 먹을 수 있었던 내게 ‘그때의 그 라면’이 지금까지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음식이다. 그곳에는 가정집에 있을 법한 3평 남짓의 방이 있었다. 공부하고 있으면 미닫이문이 살포시 열렸다. 집사님과 대학생 오빠들이 여름엔 아이스크림, 겨울엔 붕어빵을 슬쩍 건넸다. 집이 싫어 방황하던 10대 소녀에게 피아노, 아늑한 공부방, 라면 그리고 다정한 사람들이 있는 작은 개척교회는 천국이었다.
교회 옆에 고아원이 나란히 있었다. 방과 후 항상 교회에 갔고 그곳 아이들과도 친해졌다. 마당에서 함께 어울려 땅따먹기, 고무줄놀이를 했다. 교회 반주 연습을 하느라 피아노를 종종 쳤다. 그럴 때면 피아노 키 높이 보다 자그마한 그 아이들이 오밀조밀 딱 옆에 붙어 서서 나를 바라보았다. ‘언니, 나도 해 볼래.’ 이 한마디에 나는 꼬마들의 피아노와 영어 선생님이 되었다. 그때 난생처음 신기한 경험을 했다. 마음의 병을 앓던 내가 해맑고 천방지축 같던 천성을 찾아갔다. 꼬마들이 젓가락 행진곡을 치고 알파벳을 쓰며 성장하는 모습에 나도 꿈을 키웠다. 중학생 소녀에게 배움을 나누는 것은 곧 치유였다. 함께 행복을 엮을 수 있는 단단한 끈이었다. 내 인생 내가 개척해 가며 가르치는 일을 통해 아는 지식을 나누며 평생 살겠다고 다짐했다. 이것이 중학교 시절부터 지금까지 변함없이 가지고 있는 내 인생 신조(credo)이다. 가장 마음 아픈 시절에 인생의 방향을 찾았다.
누군가에게 학원은 그저 스쳐 지나갈 수 있고 힘들면 언제든지 그만둘 수 있는 직업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에게 학원은 내 정체성이다. 번쩍거리는 배경 없고 받을 유산은 더더욱 없는 평범한 개인이 학원 경영을 통해 인생을 배워 가고 있다. 모난 원석이었던 인격체가 한 배에 탄 사람들과 함께 하며 보석이 되어 가고 있다.
나도 그런 적이 있어요, 당신 마음 알아요
Been there, done that! ‘거기 있어봤고, 그거 해봤어!’
다양한 상황에서 다양한 의미로 쓰이는 표현이다. 나는 ‘공감’과 ‘위로’를 위해 이 말을 꺼내어 본다. 책 내용 대부분은 창업초기부터 10년 차 무렵까지의 일이다. 학원하면서 겪을 수 있는 건물주, 학부모, 강사, 학생 문제를 기록했다. 같은 길을 걸었던 분들께는 ‘공감’과 ‘위로’를, 준비하시는 분들께는 ‘노하우’를 전해 드리려 한다.
올해 2월에 글을 쓰기 시작했다. 책을 출간할 무렵에는 코로나가 잠잠해 질 줄 알았지만 여전히 진행형이다. 책을 쓰는 몇 달 동안 혼란스러운 마음을 다잡으며 옛 기억을 떠올렸다. 잠자고 있던 아픈 순간을 마주할 때는 화들짝 놀랐다. 그러다 학생들과 함께 했던 이쁜 추억을 만나면 환하게 미소지었다. 지나고 보니 힘들기만 한 과거는 없었다. 지금 이 순간도 과거로 남는다. 미래의 어느 날 2020년을 돌이켜 봤을 때 ‘그래도 그때 우리 참 잘 해냈어.’라고 말하고 싶다.
Let bygones be bygones and let’s make thorough preparations!
(지나간 일은 그대로 두고 우리 함께 미래를 준비해요!)
2020년 봄날
다시 태어나도 학원인, 김민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