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만과 김구는 오늘의 한국을 만든 대표적인 두 지도자이다. 일본의 《아사히 신문(朝日新聞)》은 20세기를 마무리하는 연간 기획특집 「100인의 20세기」(1998)에서 한국인으로는 이승만과 김일성(金日成) 두 사람을 다루었다. 한국에서는 일반적으로 김구의 평가가 더 높다. 이러한 평가는 저마다 다른 기준과 시각에 따른 것이겠지만, 두 사람이 한국 현대사의 중심적 존재임을 말해 주는 것임에 틀림없다. 말하자면 이승만과 김구는 20세기 한국 민족주의의 가장 큰 두 유산이다. 그 유산 가운데는 물론 빚도 있다.
나는 1970년에 단권의 『이승만과 김구』를 출판하면서, 저술동기를 다음과 같이 썼다.
<역사는 개인에 의하여 빚어지는 동시에 인간은 역사 속의 개인이다. 오늘날 이 나라의 얄궂은 정치문화는 ‘박사’와 ‘선생’이라는, 원래의 뜻보다는 엄청난 권위로 확대된 존칭이 아주 걸맞게 어울렸던 이 두 사람과 그들의 관계로부터 영향된 바 크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이 나라의 그러한 정치문화가 그들로 하여금 결국 정치적 패배의 쓴 잔을 들게 했다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전통적으로 이 땅의 정치적 운명이 국제정치질서에 의해 크게 제약받고 있었기 때문에 그 비극적 요소는 더욱 심각한 것이었다. 다시 말하면 국민들에게 공통적인, 혹은 지배적인 공감을 불러일으킬 만한 ‘삶의 방식’을 제시하기가 지극히 어려운 처지에서 이 나라의 지도자들은 고심해 왔다. 이러한 형편을 나는 퍽 동질적인 바탕이면서도 대조적인 모습으로 나타났던 이 두 사람의 정치행태를 견주어 봄으로써 다만 문제제기라도 해보려고 했다.>
그러나 그것은 의욕에 비하여 크게 미치지 못하는 작품이었다. 그리고 두 사람의 생애를 총괄하여 정치적 패배라고 평가한 것은 젊은 저널리스트의 오만과 시대적 에토스의 소산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러 면으로 부족하고 결함이 많은 이 책에 대해 정치학계에서는 한국 헌정사 연구의 선구적 성과, 또는 정치전기학의 시발로, 역사학계에서는 대한민국임시정부 연구의 본격적인 출발점의 하나로 평가해 주었다. 민망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냉전체제의 붕괴에 따른 정치적 및 사회적 분위기의 전환과 더불어 두 사람과 직접 간접으로 관련된 많은 기초자료들이 속속 공개되어 이제 자료 부족을 핑계 삼을 수는 없는 상황이 되었다. 그뿐만 아니라 그동안 국내외를 통하여 연구자들도 크게 불어나서 정치학계나 역사학계에서 발표되는 관련 분야의 연구성과는 괄목할 만하다. 여간 기쁘고 고마운 일이 아니다. 나는 이러한 조건과 연구성과들을 힘자라는 대로 활용하고, 또 한때 이 나라의 정치현장에서 활동하는 동안 깨우친 정치의 이치 같은 것도 유념하면서 『이승만과 김구』를 새로 쓰기로 했다.
이 책은 3부로 구성되어 있다. 제1부 「양반도 깨어라 상놈도 깨어라」는 두 사람의 출생에서부터 3?1운동 때까지의 지도자로 성장하는 과정을 다루었다. 이 기간은 정치학에서 말하는 정치사회화(political socialization) 과정에 해당한다. 일반적으로 정치사회화 과정의 요인으로는 가족, 학교, 종교기관, 동류집단(peer group), 직업, 대중매체, 정당, 정부조직과의 직접 접촉, 사회적 및 문화적 환경 등을 꼽는다.
궁핍한 가정환경에서 각각 독자로 태어난 이승만과 김구는 한 사람은 ‘왕족의 후손’이라는 의식을, 또 한 사람은 심한 ‘상놈콤플렉스’를 느끼면서 위에 열거한 것과 같은 정치사회화 과정을 통하여 인간은 얼마나 자기 자신을 변화시킬 수 있는지를 보여 주었다.
정치사회화 과정의 하나로서 두 사람에게 가장 중요했던 것은 청년시절의 감옥생활의 경험이었다. 이승만과 김구는 장기간의 감옥생활을 했다. 이승만은 스물다섯살부터 서른살까지의 5년7개월 동안, 김구는 20대 초반에 1년10개월 동안, 30대 중반에 4년 반 넘게 혹독한 감옥생활을 했는데, 두 사람의 감동적인 감옥생활은 그들이 각각 다른 모습의 지도자로 성장하는 아주 특별한 정치 오리엔테이션이 되었다. 이승만은 일반 사회에서라면 도저히 불가능했을 만큼 많은 학문 습득과 저술 활동을 하고 신문 논설을 썼다. 김구는 첫번째 감옥생활 때에 서양학문의 습득을 통하여 위정척사파에서 개화파로 변신했다. 두번째의 식민지 감옥은 그를 저항적 민족주의의 쇳덩어리로 달구어 낸 ‘불가마’였다.
두 사람은 이러한 정치사회화 과정을 통하여 라스웰(Harold D. Lasswell)이 말한 정치적 인간형의 인물이 되었다. 라스웰은 정치적 인간형은 사적 동기를 공적 목적에 전위하여 공공의 이익의 이름으로 합리화한다고 정의했다.
그렇게 하여 두 사람은 3.1운동 때까지는 이 나라 현대사의 핵심적 사건이나 운동에 직접 참여하여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었다. 나는 그러한 사건이나 운동의 실상과 두 사람과의 관계를 분석하고 그것이 그들의 생애와 한국 현대사에서 갖는 의미를 살펴보려고 노력했다.
제2부 「임시정부를 짊어지고」는 두 사람이 3?1운동의 결과로 수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에 함께 참여하면서부터 1945년8월15일에 민족의 광복을 맞이할 때까지 직업적 독립운동가로 활동하는 26년 동안의 정치 행태와 그 관계를 그들이 처했던 정치상황과 관련하여 살펴보았다.
임시정부를 통한 독립운동은 거족적인 독립선언의 결과로 수립된 ‘정부’의 활동이었던 만큼 그 행동양식은 어디까지나 정치활동의 성격이 강했다. 정치를 작동하게 하는 절대적인 규범은 법률이며, 법률의 권위와 효력은 정치권력의 독립된 물리적 강제력에 의하여 보장된다. 그런 점에서 독자적인 법질서의 운영이 불가능했던 임시정부의 주도권 경쟁은, 국권회복이라는 숭고한 명분에도 불구하고, 적나라한 권력투쟁으로 나타났다. 갈등의 핵심은 이데올로기와 자금문제였다.
과세권도 검찰권도 없이, 범죄자 처결 방법은 김구의 말대로 “말로 타이르는 것 아니면 사형”일 수밖에 없었던 임시정부는 본질적으로 위기정부였다. 그러한 임시정부의 임시대통령과 경무국장이라는 관계로 출발한 두 사람의 위계의식은 국무위원회 주석과 주미외교위원장이라는 역전된 직위로 귀국한 뒤에도 별로 달라지지 않았다. 이 책이 두 사람과 다른 임시정부 인사들 사이의 권력투쟁을 자세히 살펴본 것은 오늘날의 남북분단체제 고착의 원인을 되도록 정확하게 파악하고자 하는 의도에서였다.
제3부 「어떤 나라를 세울까」는 1945년10월과 11월에 국민들의 열광적인 환영을 받으며 귀국한 두 사람이 냉전체제라는 새로운 국제정치체제의 전개 속에서 독립정부 수립의 민족적 과제를 두고 어떻게 고뇌하고 어떻게 행동했는가를 살펴본 것이다. 냉전이란 본질적으로 미소 양국과 그 동맹국들 사이의 지정학적 경쟁이었던 동시에 시장경제를 신봉하는 자유민주주의와 공산주의 사이의 이데올로기 투쟁이었다고 정의된다.
말하자면 한국의 분단체제는 미소 양국의 “지정학적 경쟁”에 따라 국제냉전체제의 최전방 보루로 구축된 것이었다. 그러한 사정은 1946년5월에 내한하여 드물게 남북한을 다 여행할 수 있었던 트루먼 미국대통령의 대일배상특사 폴리(Edwin W. Pauley)의 말을 상기시킨다. 폴리는 트루먼에게 제출한 보고서에서 “한국의 공산주의는 세계의 어느 곳에서보다 좋은 출발을 할 수 있었다”라고 기술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나라가 일본의 식민지 지배로부터 해방된 지 70년이 되는 오늘에 이르기까지 한반도가 지구상의 유일한 분단국가로 남아 있는 큰 이유는 그 때문일 것이다.
이승만과 김구는 오늘의 한국을 만든 대표적인 두 지도자이다. 일본의 《아사히 신문(朝日新聞)》은 20세기를 마무리하는 연간 기획특집 「100인의 20세기」(1998)에서 한국인으로는 이승만과 김일성(金日成) 두 사람을 다루었다. 한국에서는 일반적으로 김구의 평가가 더 높다. 이러한 평가는 저마다 다른 기준과 시각에 따른 것이겠지만, 두 사람이 한국 현대사의 중심적 존재임을 말해 주는 것임에 틀림없다. 말하자면 이승만과 김구는 20세기 한국 민족주의의 가장 큰 두 유산이다. 그 유산 가운데는 물론 빚도 있다.
나는 1970년에 단권의 『이승만과 김구』를 출판하면서, 저술동기를 다음과 같이 썼다.
<역사는 개인에 의하여 빚어지는 동시에 인간은 역사 속의 개인이다. 오늘날 이 나라의 얄궂은 정치문화는 ‘박사’와 ‘선생’이라는, 원래의 뜻보다는 엄청난 권위로 확대된 존칭이 아주 걸맞게 어울렸던 이 두 사람과 그들의 관계로부터 영향된 바 크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이 나라의 그러한 정치문화가 그들로 하여금 결국 정치적 패배의 쓴 잔을 들게 했다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전통적으로 이 땅의 정치적 운명이 국제정치질서에 의해 크게 제약받고 있었기 때문에 그 비극적 요소는 더욱 심각한 것이었다. 다시 말하면 국민들에게 공통적인, 혹은 지배적인 공감을 불러일으킬 만한 ‘삶의 방식’을 제시하기가 지극히 어려운 처지에서 이 나라의 지도자들은 고심해 왔다. 이러한 형편을 나는 퍽 동질적인 바탕이면서도 대조적인 모습으로 나타났던 이 두 사람의 정치행태를 견주어 봄으로써 다만 문제제기라도 해보려고 했다.>
그러나 그것은 의욕에 비하여 크게 미치지 못하는 작품이었다. 그리고 두 사람의 생애를 총괄하여 정치적 패배라고 평가한 것은 젊은 저널리스트의 오만과 시대적 에토스의 소산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러 면으로 부족하고 결함이 많은 이 책에 대해 정치학계에서는 한국 헌정사 연구의 선구적 성과, 또는 정치전기학의 시발로, 역사학계에서는 대한민국임시정부 연구의 본격적인 출발점의 하나로 평가해 주었다. 민망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냉전체제의 붕괴에 따른 정치적 및 사회적 분위기의 전환과 더불어 두 사람과 직접 간접으로 관련된 많은 기초자료들이 속속 공개되어 이제 자료 부족을 핑계 삼을 수는 없는 상황이 되었다. 그뿐만 아니라 그동안 국내외를 통하여 연구자들도 크게 불어나서 정치학계나 역사학계에서 발표되는 관련 분야의 연구성과는 괄목할 만하다. 여간 기쁘고 고마운 일이 아니다. 나는 이러한 조건과 연구성과들을 힘자라는 대로 활용하고, 또 한때 이 나라의 정치현장에서 활동하는 동안 깨우친 정치의 이치 같은 것도 유념하면서 『이승만과 김구』를 새로 쓰기로 했다.
이 책은 3부로 구성되어 있다. 제1부 「양반도 깨어라 상놈도 깨어라」는 두 사람의 출생에서부터 3?1운동 때까지의 지도자로 성장하는 과정을 다루었다. 이 기간은 정치학에서 말하는 정치사회화(political socialization) 과정에 해당한다. 일반적으로 정치사회화 과정의 요인으로는 가족, 학교, 종교기관, 동류집단(peer group), 직업, 대중매체, 정당, 정부조직과의 직접 접촉, 사회적 및 문화적 환경 등을 꼽는다.
궁핍한 가정환경에서 각각 독자로 태어난 이승만과 김구는 한 사람은 ‘왕족의 후손’이라는 의식을, 또 한 사람은 심한 ‘상놈콤플렉스’를 느끼면서 위에 열거한 것과 같은 정치사회화 과정을 통하여 인간은 얼마나 자기 자신을 변화시킬 수 있는지를 보여 주었다.
정치사회화 과정의 하나로서 두 사람에게 가장 중요했던 것은 청년시절의 감옥생활의 경험이었다. 이승만과 김구는 장기간의 감옥생활을 했다. 이승만은 스물다섯살부터 서른살까지의 5년7개월 동안, 김구는 20대 초반에 1년10개월 동안, 30대 중반에 4년 반 넘게 혹독한 감옥생활을 했는데, 두 사람의 감동적인 감옥생활은 그들이 각각 다른 모습의 지도자로 성장하는 아주 특별한 정치 오리엔테이션이 되었다. 이승만은 일반 사회에서라면 도저히 불가능했을 만큼 많은 학문 습득과 저술 활동을 하고 신문 논설을 썼다. 김구는 첫번째 감옥생활 때에 서양학문의 습득을 통하여 위정척사파에서 개화파로 변신했다. 두번째의 식민지 감옥은 그를 저항적 민족주의의 쇳덩어리로 달구어 낸 ‘불가마’였다.
두 사람은 이러한 정치사회화 과정을 통하여 라스웰(Harold D. Lasswell)이 말한 정치적 인간형의 인물이 되었다. 라스웰은 정치적 인간형은 사적 동기를 공적 목적에 전위하여 공공의 이익의 이름으로 합리화한다고 정의했다.
그렇게 하여 두 사람은 3.1운동 때까지는 이 나라 현대사의 핵심적 사건이나 운동에 직접 참여하여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었다. 나는 그러한 사건이나 운동의 실상과 두 사람과의 관계를 분석하고 그것이 그들의 생애와 한국 현대사에서 갖는 의미를 살펴보려고 노력했다.
제2부 「임시정부를 짊어지고」는 두 사람이 3?1운동의 결과로 수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에 함께 참여하면서부터 1945년8월15일에 민족의 광복을 맞이할 때까지 직업적 독립운동가로 활동하는 26년 동안의 정치 행태와 그 관계를 그들이 처했던 정치상황과 관련하여 살펴보았다.
임시정부를 통한 독립운동은 거족적인 독립선언의 결과로 수립된 ‘정부’의 활동이었던 만큼 그 행동양식은 어디까지나 정치활동의 성격이 강했다. 정치를 작동하게 하는 절대적인 규범은 법률이며, 법률의 권위와 효력은 정치권력의 독립된 물리적 강제력에 의하여 보장된다. 그런 점에서 독자적인 법질서의 운영이 불가능했던 임시정부의 주도권 경쟁은, 국권회복이라는 숭고한 명분에도 불구하고, 적나라한 권력투쟁으로 나타났다. 갈등의 핵심은 이데올로기와 자금문제였다.
과세권도 검찰권도 없이, 범죄자 처결 방법은 김구의 말대로 “말로 타이르는 것 아니면 사형”일 수밖에 없었던 임시정부는 본질적으로 위기정부였다. 그러한 임시정부의 임시대통령과 경무국장이라는 관계로 출발한 두 사람의 위계의식은 국무위원회 주석과 주미외교위원장이라는 역전된 직위로 귀국한 뒤에도 별로 달라지지 않았다. 이 책이 두 사람과 다른 임시정부 인사들 사이의 권력투쟁을 자세히 살펴본 것은 오늘날의 남북분단체제 고착의 원인을 되도록 정확하게 파악하고자 하는 의도에서였다.
제3부 「어떤 나라를 세울까」는 1945년10월과 11월에 국민들의 열광적인 환영을 받으며 귀국한 두 사람이 냉전체제라는 새로운 국제정치체제의 전개 속에서 독립정부 수립의 민족적 과제를 두고 어떻게 고뇌하고 어떻게 행동했는가를 살펴본 것이다. 냉전이란 본질적으로 미소 양국과 그 동맹국들 사이의 지정학적 경쟁이었던 동시에 시장경제를 신봉하는 자유민주주의와 공산주의 사이의 이데올로기 투쟁이었다고 정의된다.
말하자면 한국의 분단체제는 미소 양국의 “지정학적 경쟁”에 따라 국제냉전체제의 최전방 보루로 구축된 것이었다. 그러한 사정은 1946년5월에 내한하여 드물게 남북한을 다 여행할 수 있었던 트루먼 미국대통령의 대일배상특사 폴리(Edwin W. Pauley)의 말을 상기시킨다. 폴리는 트루먼에게 제출한 보고서에서 “한국의 공산주의는 세계의 어느 곳에서보다 좋은 출발을 할 수 있었다”라고 기술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나라가 일본의 식민지 지배로부터 해방된 지 70년이 되는 오늘에 이르기까지 한반도가 지구상의 유일한 분단국가로 남아 있는 큰 이유는 그 때문일 것이다.
이승만과 김구는 오늘의 한국을 만든 대표적인 두 지도자이다. 일본의 《아사히 신문(朝日新聞)》은 20세기를 마무리하는 연간 기획특집 「100인의 20세기」(1998)에서 한국인으로는 이승만과 김일성(金日成) 두 사람을 다루었다. 한국에서는 일반적으로 김구의 평가가 더 높다. 이러한 평가는 저마다 다른 기준과 시각에 따른 것이겠지만, 두 사람이 한국 현대사의 중심적 존재임을 말해 주는 것임에 틀림없다. 말하자면 이승만과 김구는 20세기 한국 민족주의의 가장 큰 두 유산이다. 그 유산 가운데는 물론 빚도 있다.
나는 1970년에 단권의 『이승만과 김구』를 출판하면서, 저술동기를 다음과 같이 썼다.
<역사는 개인에 의하여 빚어지는 동시에 인간은 역사 속의 개인이다. 오늘날 이 나라의 얄궂은 정치문화는 ‘박사’와 ‘선생’이라는, 원래의 뜻보다는 엄청난 권위로 확대된 존칭이 아주 걸맞게 어울렸던 이 두 사람과 그들의 관계로부터 영향된 바 크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이 나라의 그러한 정치문화가 그들로 하여금 결국 정치적 패배의 쓴 잔을 들게 했다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전통적으로 이 땅의 정치적 운명이 국제정치질서에 의해 크게 제약받고 있었기 때문에 그 비극적 요소는 더욱 심각한 것이었다. 다시 말하면 국민들에게 공통적인, 혹은 지배적인 공감을 불러일으킬 만한 ‘삶의 방식’을 제시하기가 지극히 어려운 처지에서 이 나라의 지도자들은 고심해 왔다. 이러한 형편을 나는 퍽 동질적인 바탕이면서도 대조적인 모습으로 나타났던 이 두 사람의 정치행태를 견주어 봄으로써 다만 문제제기라도 해보려고 했다.>
그러나 그것은 의욕에 비하여 크게 미치지 못하는 작품이었다. 그리고 두 사람의 생애를 총괄하여 정치적 패배라고 평가한 것은 젊은 저널리스트의 오만과 시대적 에토스의 소산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러 면으로 부족하고 결함이 많은 이 책에 대해 정치학계에서는 한국 헌정사 연구의 선구적 성과, 또는 정치전기학의 시발로, 역사학계에서는 대한민국임시정부 연구의 본격적인 출발점의 하나로 평가해 주었다. 민망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냉전체제의 붕괴에 따른 정치적 및 사회적 분위기의 전환과 더불어 두 사람과 직접 간접으로 관련된 많은 기초자료들이 속속 공개되어 이제 자료 부족을 핑계 삼을 수는 없는 상황이 되었다. 그뿐만 아니라 그동안 국내외를 통하여 연구자들도 크게 불어나서 정치학계나 역사학계에서 발표되는 관련 분야의 연구성과는 괄목할 만하다. 여간 기쁘고 고마운 일이 아니다. 나는 이러한 조건과 연구성과들을 힘자라는 대로 활용하고, 또 한때 이 나라의 정치현장에서 활동하는 동안 깨우친 정치의 이치 같은 것도 유념하면서 『이승만과 김구』를 새로 쓰기로 했다.
이 책은 3부로 구성되어 있다. 제1부 「양반도 깨어라 상놈도 깨어라」는 두 사람의 출생에서부터 3?1운동 때까지의 지도자로 성장하는 과정을 다루었다. 이 기간은 정치학에서 말하는 정치사회화(political socialization) 과정에 해당한다. 일반적으로 정치사회화 과정의 요인으로는 가족, 학교, 종교기관, 동류집단(peer group), 직업, 대중매체, 정당, 정부조직과의 직접 접촉, 사회적 및 문화적 환경 등을 꼽는다.
궁핍한 가정환경에서 각각 독자로 태어난 이승만과 김구는 한 사람은 ‘왕족의 후손’이라는 의식을, 또 한 사람은 심한 ‘상놈콤플렉스’를 느끼면서 위에 열거한 것과 같은 정치사회화 과정을 통하여 인간은 얼마나 자기 자신을 변화시킬 수 있는지를 보여 주었다.
정치사회화 과정의 하나로서 두 사람에게 가장 중요했던 것은 청년시절의 감옥생활의 경험이었다. 이승만과 김구는 장기간의 감옥생활을 했다. 이승만은 스물다섯살부터 서른살까지의 5년7개월 동안, 김구는 20대 초반에 1년10개월 동안, 30대 중반에 4년 반 넘게 혹독한 감옥생활을 했는데, 두 사람의 감동적인 감옥생활은 그들이 각각 다른 모습의 지도자로 성장하는 아주 특별한 정치 오리엔테이션이 되었다. 이승만은 일반 사회에서라면 도저히 불가능했을 만큼 많은 학문 습득과 저술 활동을 하고 신문 논설을 썼다. 김구는 첫번째 감옥생활 때에 서양학문의 습득을 통하여 위정척사파에서 개화파로 변신했다. 두번째의 식민지 감옥은 그를 저항적 민족주의의 쇳덩어리로 달구어 낸 ‘불가마’였다.
두 사람은 이러한 정치사회화 과정을 통하여 라스웰(Harold D. Lasswell)이 말한 정치적 인간형의 인물이 되었다. 라스웰은 정치적 인간형은 사적 동기를 공적 목적에 전위하여 공공의 이익의 이름으로 합리화한다고 정의했다.
그렇게 하여 두 사람은 3?1운동 때까지는 이 나라 현대사의 핵심적 사건이나 운동에 직접 참여하여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었다. 나는 그러한 사건이나 운동의 실상과 두 사람과의 관계를 분석하고 그것이 그들의 생애와 한국 현대사에서 갖는 의미를 살펴보려고 노력했다.
제2부 「임시정부를 짊어지고」는 두 사람이 3?1운동의 결과로 수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에 함께 참여하면서부터 1945년8월15일에 민족의 광복을 맞이할 때까지 직업적 독립운동가로 활동하는 26년 동안의 정치 행태와 그 관계를 그들이 처했던 정치상황과 관련하여 살펴보았다.
임시정부를 통한 독립운동은 거족적인 독립선언의 결과로 수립된 ‘정부’의 활동이었던 만큼 그 행동양식은 어디까지나 정치활동의 성격이 강했다. 정치를 작동하게 하는 절대적인 규범은 법률이며, 법률의 권위와 효력은 정치권력의 독립된 물리적 강제력에 의하여 보장된다. 그런 점에서 독자적인 법질서의 운영이 불가능했던 임시정부의 주도권 경쟁은, 국권회복이라는 숭고한 명분에도 불구하고, 적나라한 권력투쟁으로 나타났다. 갈등의 핵심은 이데올로기와 자금문제였다.
과세권도 검찰권도 없이, 범죄자 처결 방법은 김구의 말대로 “말로 타이르는 것 아니면 사형”일 수밖에 없었던 임시정부는 본질적으로 위기정부였다. 그러한 임시정부의 임시대통령과 경무국장이라는 관계로 출발한 두 사람의 위계의식은 국무위원회 주석과 주미외교위원장이라는 역전된 직위로 귀국한 뒤에도 별로 달라지지 않았다. 이 책이 두 사람과 다른 임시정부 인사들 사이의 권력투쟁을 자세히 살펴본 것은 오늘날의 남북분단체제 고착의 원인을 되도록 정확하게 파악하고자 하는 의도에서였다.
제3부 「어떤 나라를 세울까」는 1945년10월과 11월에 국민들의 열광적인 환영을 받으며 귀국한 두 사람이 냉전체제라는 새로운 국제정치체제의 전개 속에서 독립정부 수립의 민족적 과제를 두고 어떻게 고뇌하고 어떻게 행동했는가를 살펴본 것이다. 냉전이란 본질적으로 미소 양국과 그 동맹국들 사이의 지정학적 경쟁이었던 동시에 시장경제를 신봉하는 자유민주주의와 공산주의 사이의 이데올로기 투쟁이었다고 정의된다.
말하자면 한국의 분단체제는 미소 양국의 “지정학적 경쟁”에 따라 국제냉전체제의 최전방 보루로 구축된 것이었다. 그러한 사정은 1946년5월에 내한하여 드물게 남북한을 다 여행할 수 있었던 트루먼 미국대통령의 대일배상특사 폴리(Edwin W. Pauley)의 말을 상기시킨다. 폴리는 트루먼에게 제출한 보고서에서 “한국의 공산주의는 세계의 어느 곳에서보다 좋은 출발을 할 수 있었다”라고 기술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나라가 일본의 식민지 지배로부터 해방된 지 70년이 되는 오늘에 이르기까지 한반도가 지구상의 유일한 분단국가로 남아 있는 큰 이유는 그 때문일 것이다.
이승만과 김구는 오늘의 한국을 만든 대표적인 두 지도자이다. 일본의 《아사히 신문(朝日新聞)》은 20세기를 마무리하는 연간 기획특집 「100인의 20세기」(1998)에서 한국인으로는 이승만과 김일성(金日成) 두 사람을 다루었다. 한국에서는 일반적으로 김구의 평가가 더 높다. 이러한 평가는 저마다 다른 기준과 시각에 따른 것이겠지만, 두 사람이 한국 현대사의 중심적 존재임을 말해 주는 것임에 틀림없다. 말하자면 이승만과 김구는 20세기 한국 민족주의의 가장 큰 두 유산이다. 그 유산 가운데는 물론 빚도 있다.
나는 1970년에 단권의 『이승만과 김구』를 출판하면서, 저술동기를 다음과 같이 썼다.
<역사는 개인에 의하여 빚어지는 동시에 인간은 역사 속의 개인이다. 오늘날 이 나라의 얄궂은 정치문화는 ‘박사’와 ‘선생’이라는, 원래의 뜻보다는 엄청난 권위로 확대된 존칭이 아주 걸맞게 어울렸던 이 두 사람과 그들의 관계로부터 영향된 바 크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이 나라의 그러한 정치문화가 그들로 하여금 결국 정치적 패배의 쓴 잔을 들게 했다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전통적으로 이 땅의 정치적 운명이 국제정치질서에 의해 크게 제약받고 있었기 때문에 그 비극적 요소는 더욱 심각한 것이었다. 다시 말하면 국민들에게 공통적인, 혹은 지배적인 공감을 불러일으킬 만한 ‘삶의 방식’을 제시하기가 지극히 어려운 처지에서 이 나라의 지도자들은 고심해 왔다. 이러한 형편을 나는 퍽 동질적인 바탕이면서도 대조적인 모습으로 나타났던 이 두 사람의 정치행태를 견주어 봄으로써 다만 문제제기라도 해보려고 했다.>
그러나 그것은 의욕에 비하여 크게 미치지 못하는 작품이었다. 그리고 두 사람의 생애를 총괄하여 정치적 패배라고 평가한 것은 젊은 저널리스트의 오만과 시대적 에토스의 소산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러 면으로 부족하고 결함이 많은 이 책에 대해 정치학계에서는 한국 헌정사 연구의 선구적 성과, 또는 정치전기학의 시발로, 역사학계에서는 대한민국임시정부 연구의 본격적인 출발점의 하나로 평가해 주었다. 민망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냉전체제의 붕괴에 따른 정치적 및 사회적 분위기의 전환과 더불어 두 사람과 직접 간접으로 관련된 많은 기초자료들이 속속 공개되어 이제 자료 부족을 핑계 삼을 수는 없는 상황이 되었다. 그뿐만 아니라 그동안 국내외를 통하여 연구자들도 크게 불어나서 정치학계나 역사학계에서 발표되는 관련 분야의 연구성과는 괄목할 만하다. 여간 기쁘고 고마운 일이 아니다. 나는 이러한 조건과 연구성과들을 힘자라는 대로 활용하고, 또 한때 이 나라의 정치현장에서 활동하는 동안 깨우친 정치의 이치 같은 것도 유념하면서 『이승만과 김구』를 새로 쓰기로 했다.
이 책은 3부로 구성되어 있다. 제1부 「양반도 깨어라 상놈도 깨어라」는 두 사람의 출생에서부터 3?1운동 때까지의 지도자로 성장하는 과정을 다루었다. 이 기간은 정치학에서 말하는 정치사회화(political socialization) 과정에 해당한다. 일반적으로 정치사회화 과정의 요인으로는 가족, 학교, 종교기관, 동류집단(peer group), 직업, 대중매체, 정당, 정부조직과의 직접 접촉, 사회적 및 문화적 환경 등을 꼽는다.
궁핍한 가정환경에서 각각 독자로 태어난 이승만과 김구는 한 사람은 ‘왕족의 후손’이라는 의식을, 또 한 사람은 심한 ‘상놈콤플렉스’를 느끼면서 위에 열거한 것과 같은 정치사회화 과정을 통하여 인간은 얼마나 자기 자신을 변화시킬 수 있는지를 보여 주었다.
정치사회화 과정의 하나로서 두 사람에게 가장 중요했던 것은 청년시절의 감옥생활의 경험이었다. 이승만과 김구는 장기간의 감옥생활을 했다. 이승만은 스물다섯살부터 서른살까지의 5년7개월 동안, 김구는 20대 초반에 1년10개월 동안, 30대 중반에 4년 반 넘게 혹독한 감옥생활을 했는데, 두 사람의 감동적인 감옥생활은 그들이 각각 다른 모습의 지도자로 성장하는 아주 특별한 정치 오리엔테이션이 되었다. 이승만은 일반 사회에서라면 도저히 불가능했을 만큼 많은 학문 습득과 저술 활동을 하고 신문 논설을 썼다. 김구는 첫번째 감옥생활 때에 서양학문의 습득을 통하여 위정척사파에서 개화파로 변신했다. 두번째의 식민지 감옥은 그를 저항적 민족주의의 쇳덩어리로 달구어 낸 ‘불가마’였다.
두 사람은 이러한 정치사회화 과정을 통하여 라스웰(Harold D. Lasswell)이 말한 정치적 인간형의 인물이 되었다. 라스웰은 정치적 인간형은 사적 동기를 공적 목적에 전위하여 공공의 이익의 이름으로 합리화한다고 정의했다.
그렇게 하여 두 사람은 3?1운동 때까지는 이 나라 현대사의 핵심적 사건이나 운동에 직접 참여하여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었다. 나는 그러한 사건이나 운동의 실상과 두 사람과의 관계를 분석하고 그것이 그들의 생애와 한국 현대사에서 갖는 의미를 살펴보려고 노력했다.
제2부 「임시정부를 짊어지고」는 두 사람이 3?1운동의 결과로 수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에 함께 참여하면서부터 1945년8월15일에 민족의 광복을 맞이할 때까지 직업적 독립운동가로 활동하는 26년 동안의 정치 행태와 그 관계를 그들이 처했던 정치상황과 관련하여 살펴보았다.
임시정부를 통한 독립운동은 거족적인 독립선언의 결과로 수립된 ‘정부’의 활동이었던 만큼 그 행동양식은 어디까지나 정치활동의 성격이 강했다. 정치를 작동하게 하는 절대적인 규범은 법률이며, 법률의 권위와 효력은 정치권력의 독립된 물리적 강제력에 의하여 보장된다. 그런 점에서 독자적인 법질서의 운영이 불가능했던 임시정부의 주도권 경쟁은, 국권회복이라는 숭고한 명분에도 불구하고, 적나라한 권력투쟁으로 나타났다. 갈등의 핵심은 이데올로기와 자금문제였다.
과세권도 검찰권도 없이, 범죄자 처결 방법은 김구의 말대로 “말로 타이르는 것 아니면 사형”일 수밖에 없었던 임시정부는 본질적으로 위기정부였다. 그러한 임시정부의 임시대통령과 경무국장이라는 관계로 출발한 두 사람의 위계의식은 국무위원회 주석과 주미외교위원장이라는 역전된 직위로 귀국한 뒤에도 별로 달라지지 않았다. 이 책이 두 사람과 다른 임시정부 인사들 사이의 권력투쟁을 자세히 살펴본 것은 오늘날의 남북분단체제 고착의 원인을 되도록 정확하게 파악하고자 하는 의도에서였다.
제3부 「어떤 나라를 세울까」는 1945년10월과 11월에 국민들의 열광적인 환영을 받으며 귀국한 두 사람이 냉전체제라는 새로운 국제정치체제의 전개 속에서 독립정부 수립의 민족적 과제를 두고 어떻게 고뇌하고 어떻게 행동했는가를 살펴본 것이다. 냉전이란 본질적으로 미소 양국과 그 동맹국들 사이의 지정학적 경쟁이었던 동시에 시장경제를 신봉하는 자유민주주의와 공산주의 사이의 이데올로기 투쟁이었다고 정의된다.
말하자면 한국의 분단체제는 미소 양국의 “지정학적 경쟁”에 따라 국제냉전체제의 최전방 보루로 구축된 것이었다. 그러한 사정은 1946년5월에 내한하여 드물게 남북한을 다 여행할 수 있었던 트루먼 미국대통령의 대일배상특사 폴리(Edwin W. Pauley)의 말을 상기시킨다. 폴리는 트루먼에게 제출한 보고서에서 “한국의 공산주의는 세계의 어느 곳에서보다 좋은 출발을 할 수 있었다”라고 기술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나라가 일본의 식민지 지배로부터 해방된 지 70년이 되는 오늘에 이르기까지 한반도가 지구상의 유일한 분단국가로 남아 있는 큰 이유는 그 때문일 것이다.
이승만과 김구는 오늘의 한국을 만든 대표적인 두 지도자이다. 일본의 《아사히 신문(朝日新聞)》은 20세기를 마무리하는 연간 기획특집 「100인의 20세기」(1998)에서 한국인으로는 이승만과 김일성(金日成) 두 사람을 다루었다. 한국에서는 일반적으로 김구의 평가가 더 높다. 이러한 평가는 저마다 다른 기준과 시각에 따른 것이겠지만, 두 사람이 한국 현대사의 중심적 존재임을 말해 주는 것임에 틀림없다. 말하자면 이승만과 김구는 20세기 한국 민족주의의 가장 큰 두 유산이다. 그 유산 가운데는 물론 빚도 있다.
나는 1970년에 단권의 『이승만과 김구』를 출판하면서, 저술동기를 다음과 같이 썼다.
<역사는 개인에 의하여 빚어지는 동시에 인간은 역사 속의 개인이다. 오늘날 이 나라의 얄궂은 정치문화는 ‘박사’와 ‘선생’이라는, 원래의 뜻보다는 엄청난 권위로 확대된 존칭이 아주 걸맞게 어울렸던 이 두 사람과 그들의 관계로부터 영향된 바 크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이 나라의 그러한 정치문화가 그들로 하여금 결국 정치적 패배의 쓴 잔을 들게 했다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전통적으로 이 땅의 정치적 운명이 국제정치질서에 의해 크게 제약받고 있었기 때문에 그 비극적 요소는 더욱 심각한 것이었다. 다시 말하면 국민들에게 공통적인, 혹은 지배적인 공감을 불러일으킬 만한 ‘삶의 방식’을 제시하기가 지극히 어려운 처지에서 이 나라의 지도자들은 고심해 왔다. 이러한 형편을 나는 퍽 동질적인 바탕이면서도 대조적인 모습으로 나타났던 이 두 사람의 정치행태를 견주어 봄으로써 다만 문제제기라도 해보려고 했다.>
그러나 그것은 의욕에 비하여 크게 미치지 못하는 작품이었다. 그리고 두 사람의 생애를 총괄하여 정치적 패배라고 평가한 것은 젊은 저널리스트의 오만과 시대적 에토스의 소산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러 면으로 부족하고 결함이 많은 이 책에 대해 정치학계에서는 한국 헌정사 연구의 선구적 성과, 또는 정치전기학의 시발로, 역사학계에서는 대한민국임시정부 연구의 본격적인 출발점의 하나로 평가해 주었다. 민망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냉전체제의 붕괴에 따른 정치적 및 사회적 분위기의 전환과 더불어 두 사람과 직접 간접으로 관련된 많은 기초자료들이 속속 공개되어 이제 자료 부족을 핑계 삼을 수는 없는 상황이 되었다. 그뿐만 아니라 그동안 국내외를 통하여 연구자들도 크게 불어나서 정치학계나 역사학계에서 발표되는 관련 분야의 연구성과는 괄목할 만하다. 여간 기쁘고 고마운 일이 아니다. 나는 이러한 조건과 연구성과들을 힘자라는 대로 활용하고, 또 한때 이 나라의 정치현장에서 활동하는 동안 깨우친 정치의 이치 같은 것도 유념하면서 『이승만과 김구』를 새로 쓰기로 했다.
이 책은 3부로 구성되어 있다. 제1부 「양반도 깨어라 상놈도 깨어라」는 두 사람의 출생에서부터 3?1운동 때까지의 지도자로 성장하는 과정을 다루었다. 이 기간은 정치학에서 말하는 정치사회화(political socialization) 과정에 해당한다. 일반적으로 정치사회화 과정의 요인으로는 가족, 학교, 종교기관, 동류집단(peer group), 직업, 대중매체, 정당, 정부조직과의 직접 접촉, 사회적 및 문화적 환경 등을 꼽는다.
궁핍한 가정환경에서 각각 독자로 태어난 이승만과 김구는 한 사람은 ‘왕족의 후손’이라는 의식을, 또 한 사람은 심한 ‘상놈콤플렉스’를 느끼면서 위에 열거한 것과 같은 정치사회화 과정을 통하여 인간은 얼마나 자기 자신을 변화시킬 수 있는지를 보여 주었다.
정치사회화 과정의 하나로서 두 사람에게 가장 중요했던 것은 청년시절의 감옥생활의 경험이었다. 이승만과 김구는 장기간의 감옥생활을 했다. 이승만은 스물다섯살부터 서른살까지의 5년7개월 동안, 김구는 20대 초반에 1년10개월 동안, 30대 중반에 4년 반 넘게 혹독한 감옥생활을 했는데, 두 사람의 감동적인 감옥생활은 그들이 각각 다른 모습의 지도자로 성장하는 아주 특별한 정치 오리엔테이션이 되었다. 이승만은 일반 사회에서라면 도저히 불가능했을 만큼 많은 학문 습득과 저술 활동을 하고 신문 논설을 썼다. 김구는 첫번째 감옥생활 때에 서양학문의 습득을 통하여 위정척사파에서 개화파로 변신했다. 두번째의 식민지 감옥은 그를 저항적 민족주의의 쇳덩어리로 달구어 낸 ‘불가마’였다.
두 사람은 이러한 정치사회화 과정을 통하여 라스웰(Harold D. Lasswell)이 말한 정치적 인간형의 인물이 되었다. 라스웰은 정치적 인간형은 사적 동기를 공적 목적에 전위하여 공공의 이익의 이름으로 합리화한다고 정의했다.
그렇게 하여 두 사람은 3?1운동 때까지는 이 나라 현대사의 핵심적 사건이나 운동에 직접 참여하여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었다. 나는 그러한 사건이나 운동의 실상과 두 사람과의 관계를 분석하고 그것이 그들의 생애와 한국 현대사에서 갖는 의미를 살펴보려고 노력했다.
제2부 「임시정부를 짊어지고」는 두 사람이 3?1운동의 결과로 수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에 함께 참여하면서부터 1945년8월15일에 민족의 광복을 맞이할 때까지 직업적 독립운동가로 활동하는 26년 동안의 정치 행태와 그 관계를 그들이 처했던 정치상황과 관련하여 살펴보았다.
임시정부를 통한 독립운동은 거족적인 독립선언의 결과로 수립된 ‘정부’의 활동이었던 만큼 그 행동양식은 어디까지나 정치활동의 성격이 강했다. 정치를 작동하게 하는 절대적인 규범은 법률이며, 법률의 권위와 효력은 정치권력의 독립된 물리적 강제력에 의하여 보장된다. 그런 점에서 독자적인 법질서의 운영이 불가능했던 임시정부의 주도권 경쟁은, 국권회복이라는 숭고한 명분에도 불구하고, 적나라한 권력투쟁으로 나타났다. 갈등의 핵심은 이데올로기와 자금문제였다.
과세권도 검찰권도 없이, 범죄자 처결 방법은 김구의 말대로 “말로 타이르는 것 아니면 사형”일 수밖에 없었던 임시정부는 본질적으로 위기정부였다. 그러한 임시정부의 임시대통령과 경무국장이라는 관계로 출발한 두 사람의 위계의식은 국무위원회 주석과 주미외교위원장이라는 역전된 직위로 귀국한 뒤에도 별로 달라지지 않았다. 이 책이 두 사람과 다른 임시정부 인사들 사이의 권력투쟁을 자세히 살펴본 것은 오늘날의 남북분단체제 고착의 원인을 되도록 정확하게 파악하고자 하는 의도에서였다.
제3부 「어떤 나라를 세울까」는 1945년10월과 11월에 국민들의 열광적인 환영을 받으며 귀국한 두 사람이 냉전체제라는 새로운 국제정치체제의 전개 속에서 독립정부 수립의 민족적 과제를 두고 어떻게 고뇌하고 어떻게 행동했는가를 살펴본 것이다. 냉전이란 본질적으로 미소 양국과 그 동맹국들 사이의 지정학적 경쟁이었던 동시에 시장경제를 신봉하는 자유민주주의와 공산주의 사이의 이데올로기 투쟁이었다고 정의된다.
말하자면 한국의 분단체제는 미소 양국의 “지정학적 경쟁”에 따라 국제냉전체제의 최전방 보루로 구축된 것이었다. 그러한 사정은 1946년5월에 내한하여 드물게 남북한을 다 여행할 수 있었던 트루먼 미국대통령의 대일배상특사 폴리(Edwin W. Pauley)의 말을 상기시킨다. 폴리는 트루먼에게 제출한 보고서에서 “한국의 공산주의는 세계의 어느 곳에서보다 좋은 출발을 할 수 있었다”라고 기술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나라가 일본의 식민지 지배로부터 해방된 지 70년이 되는 오늘에 이르기까지 한반도가 지구상의 유일한 분단국가로 남아 있는 큰 이유는 그 때문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