윌리엄 스타이그처럼 레오 리오니도 삶의 황혼기에 그림책 작가로 데뷔해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다. 첫 그림책을 발표했을 때 그의 나이는 50살이었다. 그가 그림책을 그리게 된 일화는 전설처럼 회자된다. 손자들과 함께 맨해튼에서 코넷티컷으로 가는 기차 여행을 하던 중, 그의 손자들이 열차 안 부산스럽게 돌아다녔다. 그는 아이들을 진정시키기 위해 보고 있던 「라이프」를 찢어 그림책을 만들어 보여주었다. 이것이 그의 첫 그림책 <파랑이와 노랑이>다.
그 후, 89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그는 무려 40여 권의 그림책을 만들었고 <꿈틀꿈틀 자벌레>(1960), <으뜸 헤엄이>(1963), <프레드릭>(1968), <새앙쥐와 태엽쥐>(1969)로 칼데콧 아너상을 네 번이나 수상했다. 또, 1969년 제1회 브라치스라바 그림책 원화 비엔날레에서 금사과상을 받았고, 1984년 인스티튜트 오브 그래픽 아트에서 평생의 작업에 대해 아트 골드 메달을 받았다.
그의 이력은 긴 생애만큼 화려하다. 1910년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의 부유한 유태인 가정에서 태어난 그는 자기 방 앞에 걸린 샤걀의 원화를 달력처럼 보면서 자랐다. 미술품 수집가이자 건축가로 활발하게 활동한 두 삼촌에게 큰 영향을 받은 그는 어려서부터 집 근처의 박물관에 가 유명한 화가와 조각들의 작품을 감상하고 모사하곤 했다. 이 때의 바탕은 후에 정식 미술교육을 받지 않고서도 디자이너와 조각가, 일러스트레이터, 애니메이터, 어린이책 작가가 되는데 큰 도움을 주었다.
리오니는 열두 살때부터 대학에 입학하기 전까지 가족들과 함께 프랑스, 벨기에, 스위스, 이탈리아 등 유럽을 여행하며 보냈다. 1928년년 취리히 대학에 들어가 경제학을 공부했으며, 1935년에는 제노바 대학에서 경제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1931년, 노라 머피(Nora Maffi)와 결혼한 후 이탈리아에 광고 에이전시 회사를 창업했고, 유럽의 예술잡지들에 미술과 건축에 관한 기사들을 기고했다.
1939년 이탈리아의 파시스트를 피해 미국으로 이주한 리오니는 1945년 미국시민권을 얻었다.그는 퍼슨스 디자인 학교(Parsons School of Design) 학장으로 일했고. 국제 예술가 협회를 비롯한 많은 단체의 장(長)으로, 「뉴욕타임즈」나 「포춘」 같은 잡지의 아트 디렉터로 활동했다. 그리고 50살에 어린이 그림책이라는 새로운 영역에 도전했고, 80세가 넘은 나이까지 파킨스 씨 병을 앓으면서도 꾸준히 그림책을 창작했다. 89세의 나이로 이탈리아의 자택에서 눈을 감았다.
그가 세상에 남긴 그림책들은 독자가 그림책에 요구하는 것을 모두 갖춘 마스터피스들이다. 콜라주 기법으로 그려진 단정하고 선명한 그림들, 인생의 넓이와 깊이를 모두 갖춘 주제, 간결하면서도 운율감 넘치는 짧은 글, 그리고 무엇보다 그의 그림책은 누가 읽어도 재미있다. 집단과 개인의 문제, 공동체의 선, 자아 정체감, 고단한 삶 등 다루는 주제는 어린 아이뿐 아니라 어른들까지 고민하는 것들이며, 레오 리오니는 모든 사람에게 지극히 간결하지만 위트있는 결론을 알려준다.
그는 그림책을 통해서 다른 그림책 작가들이 하지 못했던 '정신적인 가치'를 구현했다. 어쩌면 지나치게 철학적이라고 생각될만큼, 그의 그림책들은 한결같이 '나는 누구인가', '내가 나로 살기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나와 네가 행복하게 살기 위해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등을 이야기한다. 그리고 그의 대답은 <프레드릭> 속에서 아름답게 펼쳐진다. '나는 시인이야'라고 말한 수줍은 쥐 프레드릭은 레오 리오니의 자신의 모습이기도 하다. - 류화선(yukineco@aladdin.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