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때 간과해서는 안 될 사항이 하나 있으니, 이러한 비유적 구조는 시인이 사용하는 언어의 구조 및 형식의 지배를 받는다는 사실이다. 시인이 선별하여 사용하는 시어들, 그리고 시구와 시구의 유려한 음악적 어울림 역시 제반 언어 원칙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시인은 언어의 시청각적 잠재력에 해박해야 하며, 기계적인 맞춤법의 준수를 넘어서는 자유자재로운 언어능력을 갖추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된다.
시가 나에게 가져다준 선물은 헤아릴 수 없이 많다. 직접 시를 창작함으로써, 문학 쟝르로서의 시에 대한 이해가 깊어졌고, 삶의 이면에 엄존하는 현상으로서의 개체의 고통에 대해 좀더 민감할 수 있었으며, 매순간 시심으로 살려고 노력하면서, 일상의 사소한 것들이 뿜어내는 찬란한 광휘를 느낄 수 있었다. 영문학도로서 한국어 고유의 음악적 아름다움과 무한한 표현 가능성에 새삼스레 눈뜨게 된 것도 큰 기쁨이었다.
밤을 지새우며 시를 토해내던 초기의 열정은 많이 식었다. 그러나 따뜻한 시선으로 사물을 느끼려고 시도하면서, 나는 무수한 순수지속의 순간을 체험했다는 행복한 고백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하여 나는 생물학적 생존이 아닌, 사고와 감성 그리고 윤리의식과 자유의지를 지닌 주체로서의 충만한 삶을 지향하는 사람에게, 시는 과연 탁월한 생존전략이라고 확언할 수 있게 되었다. 지식과 정보량이 가속적으로 증폭되는 시대일수록 삶과 인간, 그리고 자연과 사회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을 던지는 시는 더더욱 필요한 법이다.
캄캄한 지하 곳간에 즐비하게 늘어선 항아리에 포도주가 숙성되는 과정은 은밀한 쾌감이 아닐 것인가? 이리저리 이사 다니는 동안 습작의 대부분은 분실되거나 파기되었지만, 몇 편의 시는 끝내 살아남아 이제 십여 년 만에 햇빛을 보게 되었다. 시집의 출간 여부와 상관없이 시인으로서의 확고한 자각이 있었기에, 오랜 기다림의 세월은 아니었다. 일관성의 여부와 상관없이, 한 개인의 정신과 감성의 궤적을 한 자리에 모아 시집으로 펴내는 일은, 시란 무엇이며 시인이란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하나의 모색과정으로 읽힐 수 있을 것이다.
(2003년 12월 29일 알라딘에 보내주신 작가코멘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