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 시대 말기의 유교 사상가이자 학자이다. 일찍이 유가 경전을 공부하기 시작했고, 수재로 이름이 나 열다섯 살에 학술 문화의 중심지였던 직하학궁에서 유학했다. 이후 20여 년간 여러 학자와 교류하며 학문적 명망을 쌓았고 직하학궁의 우두머리인 좨주를 세 차례 역임했다.
제나라 사람의 모함으로 초나라로 쫓겨갔을 때는 저명한 재상 춘신군이 그를 난릉 지방의 영으로 삼으려고도 했다. 하지만 그의 명성이 두려워진 춘신군은 곧 순자를 물리쳤다. 순자는 결국 진나라로 가 법가의 정책가로 명성을 날리던 응후, 범수와 진소왕을 만난다. 그러나 그들을 왕도정치로 설득시키는 데는 실패해 고향인 조나라로 돌아가게 되니 이때 그의 나이는 거의 여든에 가까웠다.
한편 초나라의 춘신군은 한 참모의 설득으로 다시 순자를 부른다. 그러나 순자는 신랄한 풍자가 담긴 답신을 보내 거절한다. 그러나 이에 굴하지 않고 여러 차례 정중한 청을 보내오는 춘신군에게 순자는 결국 초나라의 난릉령직을 수락했다. 순자의 나이 아흔여덟으로 추측되는 서기전 238년경에 춘신군은 살해되었고 순자는 난릉령에서 물러나 수만 자에 이르는 저술을 남기고 눈을 감는다.
그는 격동의 전국 시대에 제자백가의 모든 학설을 섭렵하는 치열한 학문적 노력으로 초기 유가 사상의 학문적 체계를 집대성했다. 《논어》, 《맹자》, 《도덕경》 등이 일화, 경구 등으로 채워진 서술양식이었던 데 비해, 《순자》는 유가에서 저자가 쓴 최초의 체계적인 논문이며, 총론적인 설명, 연속적인 논증, 세부적인 상술 등으로 구성된 응집력 있는 저작으로 평가받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