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에서는 월북한 남로당의 괴수, 북에서는 미제의 간첩으로 1956년 김일성에 의해 처형당한 박헌영!
80년대 끄트머리를 보낸 나에게는 일제강점기의 항일운동가이며 혁명가인 박헌영에 대한 개인사는 의문투성이였고, 쉽사리 알 수 없는 인물이었다.
그러던 중 1994년 『역사비평』 여름호에서 소련의 여류학자 사브리나 쿨리코바 여사가 쓴 「소련의 여류 역사학자가 만난 박헌영」과 1997년 『역사비평』 여름호에 실린 「혁명과 박헌영과 나」라는 글을 보게 되면서 언젠가 때가 되면 인물 근현대사로 박헌영을 그려보겠다는 소망을 갖게 되었다.
막연히 품었던 소망은 2004년 역사학자들의 11년간에 걸친 노력으로 역사문제연구소가 발행한 『박헌영 자료전집』(전 9권)의 심포지엄 및 출판기념회와 임경석 교수님의 『이정 박헌영 일대기』를 접하면서 구체화되었다. 박헌영의 생애를 만화로 그리겠다는 작은 소망은 이 자료들을 바탕으로 시작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처음 생각했던 분량은 200페이지 5권 정도였다. 하지만 작업을 하다 보니 욕심이 생겼다. 그 분량으로는 박헌영과 경성콤그룹 핵심 인물들만 담기에도 벅찼기 때문이다. 또 당시의 시대 상황을 모르고서는 박헌영을 제대로 이해하기 어렵다는 생각에 역사적 배경을 설명해야 할 필요성도 절감했다.
그리고 만화를 그리는 동안 안재성 선생님의 『박헌영』, 『이현상 평전』 등과 같은 새로운 역사들이 발굴되었다. 사전조사를 하면서 알게 된 박헌영의 누나 조봉희와 그 아들 한산스님의 이야기는 만화원고 분량을 대폭 늘리는 계기가 되었다.
암울했던 격동의 시대를 조국과 민족을 위해 바람처럼 왔다가 구름처럼 흩어져간 비운의 혁명가들의 삶을 가능한 한 많이 기록해보자는 욕심이 과해 생각보다 많은 시간을 잡아먹었다.
어느덧 10여 년의 시간이 훌쩍 지나고 말았다. 이 시간은 내 능력의 한계를 절감하는 시간이었고 내 안의 모든 에너지를 쥐어짜내는 고난의 시간이었지만, 내 능력에 새롭게 도전하고 고뇌하는 시간이기도 했다. 어쩌면 『경성아리랑』은 나에 대한 성찰의 기록인지도 모른다.
만화를 그리며 역사에 누를 끼치는 일이 없도록 픽션을 최대한 자제하고 사료와 여러 인물들의 진술에 입각한 사실적인 이야기를 그리려 노력했으며, 극적인 구성들은 합리적인 수준에서만 그리려 최선을 다했다.
이제 『경성아리랑』은 내 손을 떠나 세상에 던져졌다. 『경성아리랑』이 또 다른 근현대사를 그리는 역사만화의 시작이 되기를 바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