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책을 읽는 분에게 |
유년 시절과 고향은 헤세의 영원한 터전이다. 헤세는 이 속에서 자라고 이 속에서 사색하고 이 속에서 활동했다. 이 때문에 유년 시절과 고향은 헤세 자신의 어버이요, 동시에 후예인 것이다.
헤세가 이렇듯 뼈저리게 그리는 고향— 그것은 대자연에 숨어드는 봄 안개처럼 언제나 가시지 않는 독일 남쪽 슈바벤의 땅이었다.
그의 모든 작품이 그러하듯이 《수레바퀴 아래서(Unterm Rad)》도 그의 유년시절의 자화상이요 동시에 그의 고향 슈바벤의 얽히고 설킨 한 토막의 이야기다.
이 작품은 1906년 그의 나이 29세 되던 해 베를린의 피셔 사에서 출판되었다. 그의 출세작 《페터 카멘친트(Peter Camenzind, 1904)》에 뒤이어 발표된 이 작품으로 인해 그의 작가로서의 지위는 확고해졌다.
판을 거듭한 횟수는 무려 156판에 달하여 그의 어느 작품도 이를 따를 수 없었다. 이는 오직 만인에게 가장 다정스러운 소년시절의 즐거움과 슬픔, 희망과 절망을 절실하게 묘사했기 때문이다. 헤세가 겪은 즐거움은 곧 우리들의 즐거움이요, 헤세가 겪은 슬픔은 곧 우리들 자신의 슬픔이었다.
헤세는 1877년 7월 2일 슈바벤의 칼프에서 신교의 목사 아들로 태어났다.
열세 살 때 그는 부모의 슬하를 떠나 괴팅겐의 라틴어 학교에 들어갔다. 그리하여 이듬해에는 수많은 경쟁자를 물리치고 당당하게 관비생으로 마울브론 신학교에 입학하였다.
“슈바벤의 땅에서는 재주가 있는 아이라 해도 양친이 부자가 아닌 한, 오직 하나의 좁은 길이 있을 뿐이었다. 그것은 주州의 시험을 치러서 신학교에 들어가고 다음에는 튀빙겐 대학에 진학하여 거기에서 목사나 교사가 되는 것이었다”라고 이 소설 속에서 밝힌 것만 보더라도 그것이 헤세에게 한한 길만은 아니었다. 그러나 전도사인 조부와 목사인 아버지를 가진 헤세로서는, 관비로 목사가 되는 길을 걷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그는 선천적으로 타고난 시인의 성격으로 판에 박은 듯한 신학교의 기숙사 생활을 견뎌내지 못하고 반년도 못 되어 이곳을 도망쳐 그의 조부가 말한 이른바 천재적 여행을 떠난다. 그로 인해서 가문과 자신의 명예를 걸머지고 들어간 신학교로부터 퇴학을 당하게 된다.
‘시인이 되거나 그렇지 않으면 아무것도 되고 싶지 않다’고 느껴 신학교를 도망쳐 나오긴 했으나 시인이 되는 길은 요원했으며 혼미와 우울증으로 자살을 기도하는 등 생사의 기로에서 그는 몇 년 간 신음했다. 그는 기계공이나 서점의 견습 노릇을 하는 등, 그에게 있어서 가장 어려웠던 시기가 얼마간 계속된다.
가장 파란 많았던 이 시절— 마울브론 신학교 입학 전후에서부터 이 무렵까지— 의 체험을 자서전적으로 묘사한 것이 바로 이 작품이다.
‘수레바퀴 아래서’라는 표제는 “아주 지쳐버리지 않도록 해라. 그렇지 않으면 수레바퀴 아래에 깔리게 될 테니까”라고 작품 속에서 신학교장이 한 말로서, 무리한 공부의 희생양이 된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다. 이렇게 말하는 교장 자신도 아이들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이른바 교육자로서 수레바퀴 아래의 역할을 하고 있음을 자각하지 못한다.
그러나 이 작품은 사실과 꼭 일치하지는 않는다. 주인공 한스는 어머니가 없었으나 헤세는 인자한 어머니를 가졌고, 한스는 죽었으나 헤세는 죽지 않았다. 소설에서 주인공 한스가 자살하기에 이른 것은 인자한 어머니가 없었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항상 자기를 ‘고독자’, ‘혼자 가는 사람’이라고 일컬은 헤세는 1919년에 독일을 떠나 스위스 남단 아름다운 루가노 호반 몬타뇨라로 옮겨와 누구와도 타협하지 않은 채 혼자 사색하고 혼자 창작에 몰두하다가 1962년에 마침내 세상을 떠났다.
제1차 세계대전에 임하여 그는, 인간과 생활의 가치를 지키며 그것이 생존할 가치가 있다고 제시하는 것만이 문학자의 사명이라 믿고, 순수한 휴머니즘의 입장에서 전쟁에 반대하고 평화를 지키는 것을 펜과 행동으로 실천할 것을 주장했다.
제2차 세계대전 기간에도 그의 이러한 평화적 태도에는 변함이 없었으며, 이 사이 10년 간에 대작 《유리알 유희》를 완성함으로써 1946년에 노벨 문학상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