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열하게 살아낸 작가들의 이야기
시간의 힘을 느낀다. 500페이지가 넘는 이 책의 무게가 필자에겐 5년이란 시간의 무게로 느껴진다. 2017년 1월호부터 2022년 2월호까지 매달 사진가를 만나 작업에 대한 이야기를 나눌 때에는 매달 새로운 작가를 만나 새로운 이야기를 나눈다는 즐거움에 빠져있었다. 그런데 50명이 넘는 사진가들을 한 자리에 묶은 한 권의 책으로 대하니 매달 느끼지 못했던 감동과 깨달음이 살아난다.
지난 30여 년간 『사진예술』 잡지를 만들어오면서 숱한 사진가들을 만났고, 전시를 보았고, 인터뷰를 해왔다. 여기 수록된 작가들 가운데 대부분은 거의 30년 전부터 만나 그간의 활동을 지켜본 작가들이다. 그러므로 지금의 유명작가들이 30대 젊은 작가일 때 어떤 생각을 가졌었는지, 강산이 세 번 변한다는 30년 세월에 얼마나 변화를 겪고 성장했으며 그 과정에서 성장통을 앓았는지, 그 사연들이 차례대로 머리를 스친다. 따라서 “쉽지 않은 여건 속에서 참으로 애썼습니다. 박수를 쳐드리고 싶어요. 자랑스럽고 기쁩니다.”라는 찬사가 저절로 입 밖으로 새어나온다.
지금 다시 훑어보니 당연히 작업에 대한 이야기가 주를 이루고 있지만 사실은 작가의 인간적인 면모에 더 애정을 갖고 접근했음이 읽힌다. 인터뷰 기사에서 굳이 작품평론을 쓰기보다 그 작가가 어떤 배경으로 사진을 시작하게 되어 이런 작품에 이르렀는지, 그 작품이 나오기까지 과정과 생각, 작업을 통하여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등, 작가를 만나지 않고는 들을 수 없는 소소한 이야기를 전달하고자 노력했다. 사실 작품을 보면 작가가 보이기 마련이므로 작품에 앞서 작가의 삶의 태도와 철학을 아는 것이 작가와 작품에 대한 이해를 높여 독자들이 작업을 할 때도 도움이 되리라는 생각을 했다.
이 책에 등장하는 사진가들의 특징은 오래도록 지치지 않고 열심히 작업을 계속해왔다는 점이다. 보통 20년 이상 활동한 사진가들이 취재 대상이었으므로 그들이 그 긴 시간을 성실하게 작업해왔음을 보증하는 셈인데, 심지어 50년 혹은 그 이상을 사진가로 살아오신 원로 선생님들도 적지 않다. 사실 사진잡지를 해오면서 그동안 반짝 등장했다가 사라진 작가들을 얼마나 많이 봤던가. 그만큼 외롭고 어려운 길이라는 것을 잘 알기 때문에 마음이 숙연해진다. 또한 성실성 못지않은 특징은 사진가들마다 고유의 색깔을 흔들림 없이 견지해왔다는 점이다. 50여 명 사진가들의 이야기가 다 다르고 개성이 도드라져서 지루할 틈이 없다. 어쩌면 이렇게 저마다 다른 꽃을 피운 것일까? 52색 크레파스 뚜껑을 연 것처럼 다채로움에 감탄하며 한편으론 이 작가들이 살아남은 이유를 깨닫는다.
마지막으로 느껴지는 것은 운명의 힘이다. 대부분의 작가가 운명적으로 사진과 만나게 되고 한 걸음씩 전진하며 필연적인 계기를 만나 도약하고 그 과정에서 필요한 사람을 만나 힘을 얻고 나아가는 과정이 마치 한 편의 소설이나 영화를 보듯이 흥미진진하다. 어쩌면 중도에 사진을 포기한 사람들은 그런 운명적인 끌림이 없었거나 있었는데도 알아채지 못하고 놓쳐버린 사람들일지도 모른다. 그런 의미에서 지금 이 순간, 한국의 사진이 이만큼 풍요로울 수 있도록 운명의 끈을 놓치지 않고 치열하게 작업해준 사진가들에게 고마울 따름이다. 물론 필자와 인연이 닿지 않아 이 책에 수록되지 않은 훌륭한 사진가들도 포함해서 하는 말이다. 미리 작가들의 명단을 작성하여 계획한 인터뷰가 아니라 잡지의 속성상 매달 이슈를 따라간 것이므로 이런저런 사정 때문에 빠진 훌륭한 작가들이 있다. 안타깝지만 일단 여기에서 매듭을 짓게 되어 그런 작가들에게 미안하고 아쉽다.
올해는 월간 『사진예술』이 창간 33주년이 되는 해이다. 이명동 선생님이 창간하시고 김녕만 대표에 이어 현재 이기명 대표가 3대째를 이어온다. 사진가들의 생존 못지않게 전문잡지의 존속도 힘들고 어렵긴 매한가지였다. 그러나 그 긴 세월을 함께 견디어왔으니 사진가 여러분에게 경의를 표하지 않을 수 없다. 33주년 기념으로 이 책을 내면서 사진가 한 분 한 분에게 진심으로 감사하다. 함께 이야기를 나누며 감동하고 때론 울컥하기도 했던 기억들, 귀한 시간을 내주고 ‘따뜻한 글, 고맙다’는 인사까지 보내준 작가들, 사진이란 이름으로 공감하고 소통했던 시간들이 쌓여 여기에 이르렀다.
끝으로, 이 책이 세상에 나오고 또한 작품이 전시될 수 있도록 도와준 화순군립 천불천탑사진문화관에도 깊은 감사를 드린다. 아름다운 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