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AIST 화학과에서 이론물리화학 박사학위를 하고, IT회사에서 소프트웨어 개발 작업에 참여했다. 지금은 지식공동체 수유너머 파랑에서 철학과 과학학, 페미니즘을 공부하고 강의한다. 지은 책으로는 『해러웨이, 공-산의 사유』, 『감응의 유물론과 예술』(공저)이 있으며 해러웨이의 『트러블과 함께하기』, 『종과 종이 만날 때』를 우리말로 옮겼다.
심(sym)은 ‘함께’이고 포이에시스(poiesis)는 ‘제작하다’, ‘생산하다’를 뜻하니, 심포이에시스는 공-작(共-作) 아니면 공-산(共-産)을 뜻한다. 모든 제작이나 생산은 다른 무언가와 함께-제작하는 것이고 함께-생산하는 것이다. 혼자 일하는 장인도 그의 도구들과 함께-제작하고, 홀로 조용히 서서 생존하는 소나무도 햇빛, 물, 땅 속의 균류와 영양소 등과 함께 자신의 생명을 생산한다. 후자의 경우는 제작이란 말이 어울리지 않으니 심포이에시스를 함께-생산함을 뜻하는 공-산으로 번역하려 한다. 모든 생명은 그렇게 다른 무언가와 함께하는 공-산의 체계 속에서 생산된다.
공-산을 뜻하는 심포이에시스는, 하나의 막을 가지며 그 안에서 여러 성분들이 하나의 계를 이루는 ‘오토포이에시스(auto-poiesis)’를 한 걸음 더 밀고 나간 말로 도나 해러웨이가 제안한 개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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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산은 누구도 독점적인 소유자이기만 했던 적은 없었고, 모두가 평등했던 적도 없었음을 표명하는 말이다. 유한한 생명은 반드시 ‘무엇’을 필요로 하고, ‘누구’인 자와 ‘무엇’이 된 자의 권력 관계는 당연히 불평등하다. 하지만 ‘누구’와 ‘무엇’이 항상 고정되어 있지는 않다. 주체(누구)와 대상(무엇)의 불평등한 권력 관계에 민감했던 페미니즘은 주체와 대상의 행복한 합일을 추구했고, 자신의 몸에 타자를 받아들이는 ‘여성성’에서 그 희망을 찾기도 했다. 하지만 여성 역시 ‘무엇’을 필요로 하는 ‘누구’이고, ‘누구’에 대한 ‘무엇’이기도 하다. 폭력이 없고 이용(exploitation)이 없는 무구한 위치는 어디에도 없다. 하지만 동시에 일방적인 폭력도 일방적인 이용도 불가능하다. 이 불가능성이 공-산을 가능하게 한다. 그러므로 모든 것이 평등해진 후에야 공-산이 가능해진다고 여길 필요가 없다. 우리는 한 번도 공-산에서 벗어난 적이 없었다. 그렇지 않으면 생존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 우리는 지구의 공-산 시스템에서 퇴출될 위기에 있다. 이것이 우리가 공-산을 이야기해야 할 이유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