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3년 《소설문학》에 단편이 당선되고, 1987년 여성동아 장편소설 공모에 《여왕선언》이 당선되경북 예천 출생.
1983년 〈소설문학〉에 단편 〈제3의 성〉 당선.
1987년 〈여성동아〉에 장편 〈여왕선언〉 당선.
중편 〈나는 왕이로소이다〉와 〈모독〉으로 KBS 방송문학상 수상.
2007년 SBS 특집극 〈할매꽃〉 당선.
장편소설집으로 《메아쿨파》, 《그네 위의 두 여자》, 《백번 선 본 여자》, 《내 안에 먼 그대》 등이 있음.
멀리, 함께 가는 사람들
빨리 가는 사람은 혼자 가고, 멀리 가는 사람은 함께 간다.
우리 동인지를 생각할 때 이 비유처럼 적절한 말도 없는 것 같다.
이전 선배님 세대는 잘 모르겠지만, 1987년 내가 등단한 이후의 기억으로 길게는 2, 3년에 한 번, 짧게는 1년에 한 번씩 동인지를 냈다. 그런 성과는 이렇듯 ‘함께’가 아니었으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물론 동인지의 든든한 버팀목은 박완서 선생님이셨다. 솔직히 선생님이 계셨기에 그런 활동이 가능했다.
우리 동인지는 어머니의 넓은 치마폭을 닮았다. 박 선생님 같은 대가에서부터 그해 막 등단한 신인을 함께 품었고, 어쩔 수 없이 드러나게 마련인 작품의 우열과 작품의 극적인 차이들도 함께 품었으며, 꼭 원고를 두어 달씩 늦게 제출하는 동인이 있기 마련인데 그런 지각생도 군소리 없이 기다리고 품었다.
솔직한 고백을 해보겠다.
우리 동인들 가운데는 이미 일가를 이루어 더 이상 말이 필요 없는 동인도 많고, (다른 분야에서까지 일가를 이룬 분을 포함하여) 아직 문청(文靑)의 서슬 푸른 기상을 간직한 갓 등단한 후배도 있지만, 몇몇 동인들은 여전히 나처럼 배가 고프다. 우리를 지지하는 한 사람의 확실한 평론가도 가지지 못했고, 몇 권의 책을 냈지만 대중적인 인지도도 획득하지 못했고, 억대의 상금을 내건 공모에 당선되어 낙양의 지가를 올리지도 못했다. 더구나 문학이 죽었다는 시대에 우리를 필요로 하는 지면도 거의 없다. (동인지를 출간해주시겠다고 선뜻 나선 예감출판사에 깊은 감사를 드린다.) 그래도 우리는 쓴다. 왜? 우리는 작가이므로.
고은 시인이 최근 일본의 지진 참사 앞에서 “인류는 인류의 불행으로 자신을 깨닫는다”는 표현을 하셨는데 우리는 서로의 얼굴에서 나를 본다. 문학에 대한 그 열정과 외로움을, 짝사랑의 지리멸렬함을. 내 경우, 컴퓨터 안에 세상에 소리쳐 발표하지 못하고 웅크려 있는 작품을 수편 품고 있는데, 그 막막함도 우리는 서로의 모습에서 본다.
그래도 우리는 날마다 꿈을 꾼다. 날마다 분발한다. 발레리나 강수진은 1년에 천여 켤레의 토슈즈가 닳아 없어지고 그 발이 기괴한 나무뿌리처럼 되도록 연습에 연습을 하고서야 신을 감동시킬 수 있었다. 작고한 이윤기 선생은 진정한 작가가 되려면 모기가 무쇠 솥을 뚫는 노력과 결기와 끈기가 있어야 한다고 했다. 모기가 가마솥을 뚫는다!! 무지막지 어마어마한 말이다. 뚫지는 못해도 적어도 무쇠 솥에 머리통은 끝도 없이 박아봐야 하지 않겠나. 그러고 나서 나를 변명이라도 해야 하지 않겠나.
아직 눈길에 표표히 찾아온 손님처럼 매화가 피더니, 아기 옹알이하듯 산수유 꽃망울이 터지더니, 목련 꽃망울이 어릴 적 먹던 달근한 무명다래처럼 부풀어 오르는가 싶더니 제 맘껏 흐드러지고, 개나리 진달래가 활짝 피었다. 천지를 어찔하게 하는 벚꽃도 아파트 길을 따라 곧 흐드러지리라.
우리 동인들에게는 박완서 선생님 없이 맞이하는 첫 봄이다. 부디 하늘에서 선생님의 문재(文才)를 우리 후배들에게 넉넉히 나누어 주시기를.
2011년 봄